[이태상 칼럼] 놀이를 즐기라(Enjoy the Game)

이태상

9.11 직후 뉴욕타임스에 희한(稀罕)한 전면광고가 실렸었다. 지면 한가운데 고인의 사진 한 장과 출생과 사망 일자와 함께 그 밑에 아직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남긴 ‘놀이를 즐기라(Enjoy the Game)’는 ‘유언’이었다.

우리가 구름잡이라 할 때는 그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요즘 우리가 ‘구름(clouds)’이라 할 때는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이기보다 ‘데이터 구름(data clouds)’이나 ‘네트워크 구름(network clouds)을 말할 정도로 자연계와 기술계가 구분이 분명치 않게 되었다.

2015년 출간된 ‘경이로운 구름(The Marvelous Clouds: Toward a Philosophy of Elemental Media)’ 에서 미국 아이오와 대학 커뮤니케이션 교수 존 다럼 피터스(John Durham Peters, 1958 - )는 클라우드가 우리의 새로운 환경으로 가까운 미래에 잡다한 모든 것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고, 인간의 몸이 단말기가 되어 구름과 우리 몸 사이에 문서와 영상이 흐르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우리는 흔히 매체(media)가 환경 (environments)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역(逆)도 또한 진(眞)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2015년에 나온 ‘모든 것의 진화: 어떻게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성되는가(The Evolution of Everything: How New Ideas Emerge)’와 ‘붉은 여왕(The Red Queen: Sex and the Evolution of Human Nature, 1994) 그리고 ‘유전체(遺傳體) 게놈(Genome, 1999)’과 ‘합리적인 낙관주의자: 어떻게 번영이 이루어지는가(The Rational Optimist: How Prosperity Evolves, 2010)’ 등 베스트셀러 과학 명저의 저자이면서 영국의 저널리스트인 매튜 리들리(Matthew White Ridley, 1958 -)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과학이란 사실을 수집해 나열해 놓은 카탈로그가 아니고, 새롭고 더 큰 미스터리를 찾는 일 Science is not a catalog of facts, but the search for new and bigger mysteries.”이라고 말한다.

아일랜드의 철학자 조지 버클리(비숍 버클리라고도 불리는 George Berkeley/Bishop Berkeley 1685-1753)는 “세상은 다 우리 마음속에 있다(The world is all in our minds.”라고 했다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같은 뜻이리라.

우리 선인들은 인생이 하늘의 한 조각 뜬구름 같다고 했다. 구름이 있으면 천둥·번개도 있게 마련이다. 달라이 라마의 육성이 담긴 음악이 최근 빌보드 뉴에이지 앨범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 앨범은 그 제목이 ‘내면세계(Inner World)’라는 만트라(Mantra) 진언(眞言)을 암송하는 명상음악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고립된 상태에서 시선을 안으로 돌려 마음을 돌아보고 우주로 비전을 넓히라는 뜻이리라.

“네 세상은 너, 난 내 세상 Your world is you. I am my world.”

미국의 시인 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 1979-1955)의 ‘소나무 숲속 작은 닭들(Bantams in Pine-Woods)’에 나오는 한 시구(詩句)이다.

스티븐스는 낮에는 직장인 보험회사 일을 보면서 밤에는 어떻게 자신과 세상이 서로에게 의지하는지, 어떻게 자신이 경험하게 되는 세상을 자신이 창조하게 되는지, 평생토록 시작(詩作)을 통해 천착(穿鑿)했다고 한다.

2016년 출간된 미국 시인 폴 마리아니(Paul Mariani, 1940 - )의 평전 ‘The Whole Harmonium: The Life of Wallace Stevens”에 따르면 스티븐스에겐 뭣보다 신(神)의 죽음이 추상적인 개념이나 진부한 문구가 아닌 영구적인 도전으로 이를 그는 예술과 윤리적인 문제로 심각하고 진지하게 다뤘다.

우리가 스폰서로서의 신(神)의 후원 없이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 자신의 삶의 의의를 우리가 찾아 만들어 낼 책임이 우리 각자에게 있다는 것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스티븐스 시(詩)의 주제가 되었다. 그의 해법이란 한 때 종교가 맡았었던 역할을 이젠 시(詩) 혹은 더 넓게 우리의 상상력이 수행해야 한다는 거다. 이를 스티븐스는 ‘예술지고의 픽션 (supreme fiction of art)’이라 명명한다.

이 최상 지고의 픽션(supreme fiction)은 신화가 청소 제거되었으나 시어(詩語)로 승화된 현실로 우리를 돌려준다고 그의 ‘최고 픽션을 위한 노트(Notes Toward a Supreme Fiction)’에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와 우리 이미지를 추방한 하늘의
더할 수 없이 아득히 먼 청결함으로
깨끗이 씻긴 해맑은 해라는 생각으로
바라볼 때 태양은 얼마나 깨끗한가.How clean the sun when seen in its idea,
Washed in the remotest cleanliness of a heaven
That has expelled us and our images.”

‘눈사람(The Snow Man)’에서 그는 또 이렇게 적고 있다.

“그 자신은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거기에 있지 않은 아무것도
그리고 있는 아무것도
Nothing himself beholds
Nothing that is not there and
Nothing that is.”

마치 유체이탈(幽體離脫)이라도 하듯 초연한 경지에서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물을 관조한 스티븐스는 시인이라기보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에서 하나의 우주를 창조한 마술사 아니 어쩌면 신(神)이었으리라.

이것이 어디 스티븐스뿐이랴. 우리 모두 다 그렇지 않나.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떠나는 순간까지 쉬지 않고 각자는 각자 대로 각자의 현실, 곧 자신만의 세상과 우주를 시시각각으로 창조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니 우린 모두 코스모스바다에서 출렁이는 성신(星神/身) 코스미안임을 잠시도 잊지 말아야 할 일이어라.

1938년에 출간된 네덜란드 문화사학자 요한 하우징아(Johan Huizinga 1872-1945)의 ‘호모 루덴스(Homo Ludens)’란 책이 있다. 이 ‘호모 루덴스’는 ‘유희의 인간’을 뜻한다. 인간의 본질은 유희를 추구하는데 단순히 노는 것이 아니고 정신적인 창조 활동 곧 문화 현상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어차피 인생이 소꿉놀이 소꿉장난 같다면 이렇게 놀면 어떻고 저렇게 놀면 어떠리.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놀이와 장난을 할 필요도 없고 같은 길을 갈 이유도 없으리라. 그리고 매사에 너무 심각할 것도 없지 않을까?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겠지만 그래도 각자는 각자 제멋대로, 제 마음대로, 제 가슴 뛰는 대로 살아보는 것 이상 없지 않을까?
 

일정시대 내가 국민(초등)학교 1학년 때 일본인 여자 담임 선생님이 첫 수업시간에 해주신 말씀을 나는 평생 잊지 않고 살아왔다. 학생으로서뿐만 아니라 가정과 직장 그리고 사회인으로서도 말이다. 그 말씀이란 세 가지 학생이 있는데 숙제나 공부를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 낙제생, 시키는 대로 하는 모범생, 그리고 시키기 전에 본인 자신이 알아서 잘하는 우등생이라고 하셨다.
 
영어에 최선을 희망하되 최악에 대비하라(Hope for the best, prepare for the worst)는 말이 있다. 최선을 희망하는 낙관론자이다 보면 실망할 일이 다반사고, 최악에 대비하는 비관론자이다 보면 자칫 패배주의에 빠져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일찍부터 낙관론자나 비관론자가 되기보다는 ‘만족론자(contentist)’가 되기로 작심했다. 결과가 어떻든 내 최선을 다해보는 그 자체에 만족하기로.
 
삶 그 자체가 목적이고 어떤 삶이든 열심히 살아보는 인생예술가(Artist of Life) 외에 다른 예술가가 있을 수 없으며 성공이란 결코 행선지 종착점이라기보다 여정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여정 그 자체가 전부로 곧 보답이고 보람이며 보상(Journey is the reward)이 아니랴. 따라서 언제나 어떤 경우에도 승자는 노력하고 패자는 불평(Winners Practice and Losers Complain) 하지 않던가. 대학 가야만 사람노릇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인생대학’의 학생으로 평생토록 자신의 인격을 닦고 자아완성의 길을 가는 구도자(求道 者)가 될 생각을, 그리고 취직보다는 창직(創職)할 생각을 해볼 수 없을까.
 
언젠가 한국에서 ‘공부가 인생의 전부냐’ 는 항변의 유서를 남기고 남녀 중3생이 동반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뉴스에 나는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이 두 어린 목숨을 끊게 한 병들대로 병들고 삐뚤어진 우리 한국사회에 분통이 터졌다. 경기도 용인 N중학교 3학년생 15세의 유 모 군과 같은 반 14세의 한 모양이 남긴 유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공부를 잘할 자신이 없어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나중에 쓸모 없는 2차 방정식의 값을 구하기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부모님과 선생님 그리고 친구들과의 사랑을 잃었습니다. 우리들의 시체를 같은 곳에 묻어주세요. 행복이 성적순으로 되는 세상, 공부만 하면 인간입니까? 저희들은 새장 속에 갇혀있는 새가 아닙니다. 이제 하늘 높이 날고 싶습니다.”
 
이 두 어린 소년 소녀의 유서에서 우리는 그 어떤 철인 현인의 도통한 경지 이상의 해탈을 볼 수 있다. 이 순수하고 용기 있는 어린이들은 어른들의 속물근성에 물들고 동화되기를 죽음으로 거부한 것이다. 이들은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고 사랑이 인생의 전부라고 절규하면서 공부벌레로 살기보다는 인간으로 죽기를 선택했다. 그것도 서로 좋아하는 남녀로서 동반자살, 정사(情死)하면서 시체를 같은 곳에 묻어 달라고 했다.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
 
불행하게 사는 것보다 행복하게 죽는 길을 택한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너무도 애처롭고 안타까운 것은 이 어린이들을 보고 죽을 용기로 더 좀 용감하게 독창적으로 파격적으로 비세속적으로 살아보란 말을 해주는 사람이 이들 주위에 없었음이다. 이들이 진정으로 필요한 부모님과 선생님 그리고 친구들과의 사랑을 잃었을지언정 서로 사랑하는 짝끼리 죽음의 동반자가 되기 전에 삶의 동반자가 되어보라고 이들에게 일러주는 사람이 이들 주위에 하나도 없었음이다. 누가 타이르지 않아도 이들 본인 스스로가 그런 마음 먹을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랴.
 
공부를 잘할 자신이 없어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드릴 수 없다고 두 학생은 유서에서 말한다. 예부터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자식더러 부모 행복하게 해달라고 강요하기보다 자식의 마음 편하고 즐겁게 해주는 게 부모 된 도리일 텐데 세상이 거꾸로 되어도 한참 거꾸로 된 것 아닌가. 진정으로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드리는 길이 학교 공부보다 인생공부와 인간수업을 잘해서 훌륭한 사람으로 보람되게 잘 살아주는 것이라고, 무엇을 하든 저 좋은 대로 저하고 싶은 대로 저 살고 싶은 대로 살아보라고 격려해주는 것이 참된 어버이 마음이란 것을 이 두 어린 마음속에 왜 진작 좀 더 일찍이 심어줄 수 없었을까.
 
세상사는 길이 이 세상사람 수만큼이나 다 다른 여럿인데 어떻게 이처럼 한 길밖에 없는 것 같이 이들을 세뇌시켰더란 말인가. 아무리 사(ㅅ)자 좋아하는 세태요 사회라지만 그 사(ㅅ)자라는 것이 다 시대착오적인 남존여비 관존민비사상의 잔재가 아니던가. 저 아일랜드의 노벨문학상(1925) 수상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 (George Bernard Shaw, 1856- 1950)가 갈파했듯이 오늘날 ‘모든 전문적인 직업인들이란 일반 대중을 등쳐먹는 공모자들이다. All professions are conspiracies against the laity.’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런 ‘사(ㅅ)자’님들을 떠받드는 세상 사람들이 또 한 공모자들 아닌가.
 
‘저희들은 새장 속에 갇혀있는 새가 아닙니다. 이제 하늘 높이 날 고 싶습니다.’ 이 얼마나 순수하고 자연스럽고 건전한 소망과 꿈이었나. 그렇다면 이들을 입시지옥 성적순으로 도배된 공부방에 가둬 두지 말고 밖에 나가 씩씩하게 신나도록 뛰어놀면서 이들의 날개가 어서 크고 튼튼해져 세상을 높이 나는 법을 배우도록 해줬어야 한다.
 
타락한 어른들이 순수한 어린이와 젊은이들을 가르치기보다는 이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어른들이 가르친다는 교육이 고작 각종 편견과 화석화된 고정관념뿐이니 우리 사회가 바로 되자면 어린이들이 어른을 깨우쳐 가르치는 역교육 현상이 일어나야 할 것 같다. 그렇지 않고 현존하는 몰인격 몰인성 몰개성 교육이 판치는 한 이솝 우화에 나오는 애꾸눈 원숭이들이 두 눈 가진 원숭이의 멀쩡한 눈 하나를 빼서 생 애꾸눈 원숭이로 만드는 결과밖에 없지 않겠는가. 프랑스의 비행작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ery 1900-1944)의 ‘어린 왕자(The Little Prince)’나 한스 크리스찬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 1805-1875)의 동화 ‘황제의 새 옷(The Emperor’s New Clothes,’에 나오는 아이와 같은 스승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이메일 :1230ts@gmail.com

 

작성 2023.08.12 09:00 수정 2023.08.12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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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