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석 칼럼] 덩굴손

허석

동살이 터온다. 어둠이 뒷걸음질한 자리에 희붐한 빛다발이 한 움큼씩 발을 들여놓는다. 성하의 하늘빛이 간밤에 놀고 간 흔적이 뜰 안에 분분하다. 별빛마당의 대기는 청정한 고요로, 달빛 창가의 바람은 모시색으로 물들었다. 새벽이슬 품은 잎사귀들이 젊은 새내기마냥 새뜻한 웃음이다. 벌 나비는 아직 보이지 않는데 꽃들은 해맞이에 소리 없이 분주하다. 

 

세숫대야만 한 골목 어귀 하늘에 연둣빛 아지랑이가 하늘거린다. 담장 위로 고개를 내민 실낱같은 생명체, 햇귀를 맞으며 창공을 향해 무작정 손을 뻗은 덩굴손이다. 조류에 흔들리는 말미잘처럼 한줄기 실바람에 온몸이 휘청거린다. 의지가지없는 듯 작은 중력에도 허리가 꺾일 듯 위태롭다. 농현 줄처럼 떨고 있는 둥근 손, 살아내야 한다는 앞날의 두려움에 귀때기가 파랗다.

 

수채화 같은 손가락, 아기 피부처럼 여리지만 물오른 버들가지처럼 탱탱하다. 가냘프고 수줍어서, 건드리면 ‘흡’하고 오므라들 감응 식물처럼 매사에 조심스럽다. 꾸미거나 뽐냄도 없고, 야무지거나 당당해 보이지도 않는다. 탈피각으로 세상을 거듭나는 애벌레처럼 꼬물꼬물 겨드랑이마다 새물내가 풍겨 나올 것 같다. 생존을 위한 도구로는 섬섬하기 그지없는 손이지만 매몰찬 여름 태풍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후방에서 진두지휘하는 장군의 기세가 아니다. 곤충의 더듬이처럼, 군대의 전초병처럼 선두에 나서서 길을 개척하는 고성능 레이더망이고 최정예 상륙부대이다. 몸이 따라가야 할 방향을 여는 뱀의 혓바닥이다. 단어를 끌고 가는 접두사다. 좌표도, 나침반도 없이 달랑 괴나리봇짐 둘러메고 삶의 여정을 떠나는 외로운 나그네이기라도 한 걸까.

 

신의 지문일까. 더듬어도 잡히지 않는 삶에 손끝마다 물음표의 형상이다. 해독할 수 없는 상형문자처럼 뭔가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것 같다. 손가락을 오므렸다 폈다, 주먹을 쥐었다 풀었다, 소리 없는 손이 말하는 수어(手語)처럼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원근도 없는 안개 같은 세상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 미처 알지 못하는 무력감이 때때로 슬프다. 불확실한 삶의 행보가 불안하고 초조하다. 나선형의 시간을 엮는 줄기와 올망졸망한 잎들이 발밑에서 아우성이다. 남들은 제 길을 가고 있는데 나만 홀로 미궁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내려놓을 수 없는 책임감에 목덜미가 서늘하다.

 

내 자리, 내 것에 대한 권한은 애초부터 없었다. 고작 남의 영역에 더부살이, 노숙자처럼 잠시 머물다 마른 삭정이로 소멸할 뿐이다. 세상이 만만한 게 아니다. 타감 작용의 물질을 뿌려 다른 식물의 생육을 저해하거나, 가시나 독으로 무장한 채 자기 울타리를 견고히 방어하거나, 빈틈없이 옆까지를 늘려 햇빛을 독차지하려는 기세등등한 나무들에 둘러싸여 날품팔이하듯 변방을 기웃대며 살아내야 한다. 힘은 부쳐도 운명은 운명대로, 조건은 조건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자기를 아끼고 사랑하는 일이다. 오직 내 힘으로, 맨몸을 무기로 물수제비뜨듯 세상과 맞짱 뜰 뿐이다.

 

거미가 진감을 통해 먹이를 분별하듯 덩굴손은 촉감을 통해 견고를 변별한다. 깨끼발로 붙잡은 작은 나뭇가지, 어느새 꼭 쥔 손을 놓치지 않으려 공중곡예 하듯 온몸의 체중을 싣는다. 사지를 뻗어 암벽타기를 시작한다. 가시덤불이건, 지푸라기던 손만 붙잡을 수 있다면 생(生) 하나 일으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간절함이다. 적진 향해 무작정 달려가는 초보 전투병처럼 몸을 사리거나 움츠러드는 일은 없다. 튼튼한 교량 하나 놓을 수만 있다면 밟혀도 꺾이지 않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각오는 이미 되어있다.

 

치열하게 산다는 것은 누군가를 책임지겠다는 거였다. 누구에게나 각다분한 인생이지만 어떤 시련과 좌절도 견디어내는 것은 사랑과 희생을 쏟을 대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살아가는 힘이고 동기부여였다. 고통에 익숙한 영혼은 없게 마련, 단지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두려움과 막막함 일뿐이었다.

 

그래도 세상살이는 힘들다. 손을 뻗어 무엇이든 붙잡으려 하지만 허방다리를 집듯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다. 하늘로 곧추섰던 덩굴손에 스르륵 힘이 빠진다. 길을 잃고 헤매는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푸는 행동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닌 세상이다. 담장 위에 막대기 하나 올려주는 작은 성의마저 무심코 지나치지는 않았던가.

 

손을 잡는다는 것, 그것은 관계의 시작이고 세상을 확장하는 일이다. 삶에 대한 애정이며 존재에 관한 관심이다. 낯설고 투박할지라도 마주 잡은 손에는 따뜻한 긍정의 힘이 흐른다. 세상이 그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다거나, 살아내면 무언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일깨워주면 누구든 결코 자신의 삶을 내던지지 않을 것 같다.

 

덩굴손에 가만히 손을 대어본다. 갓난아기의 꼬물거리는 손가락이 빙그레 내 엄지 하나를 꼭 쥐어오는 것 같다. 꽃결보다 부드러운 연둣빛 살결 위로 하얀 꿈이 걸어 나온다. 허공을 움켜쥐고 있던 덩굴손 끝에 배시시 내미는 배냇니, 햇살 한 움큼 베어 물고 살며시 눈뜨고 있다.

 

 

[허석]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저서 : [꿈틀, 삶이 지나간다]

[그 남편, 그 아내]

[시간 밖의 시간으로]

[삶, 그 의미 속으로]

천강문학상 수상

등대문학상 수상

흑구문학상 수상

선수필문학상 수상

원종린수필문학상 수상

이메일 :sukhur99@naver.com

 

작성 2023.08.22 09:47 수정 2023.08.22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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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