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이 알아주지 않는 노력, 보이지 않는 노력은 언젠가 보상받는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는 건 없다. 막막한 삶에 지켜 노력도 포기하게 만드는 세상이다.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과정은 잘못이 없다. 적자생존의 정글에서 어떡하든 살아남아야 한다. 모든 생존은 정당하지 않고 순결하지도 않다. 선하면 생존에 불리한 세상이다. 군중 속에 숨어 있는 악당들이 언제 어디서 악을 행할지 모르는 불안감으로 살아가야 한다. 갑질하는 악당, 스토킹하는 악당, 불특정 다수를 향해 질주하는 악당, 일면식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칼부림하는 악당들이 우리 삶을 위협하고 있다. 빌어먹을 세상이다.
사뿐한 발걸음으로 즐겁게 지하철도 타고 밤거리를 재잘거리며 걸어도 보고 아침 햇살에 맺힌 이슬방울을 바라보면서 여유롭게 산책도 할 수 있는 평화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불안한 마음으로 출퇴근해야 하고 휴일을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일상을 되찾아야 한다. 어디에 숨어 있는지 모를 악당들을 경계하며 하루하루를 산다는 건 지옥이다. 죄를 지으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하는 사회 시스템을 확립해야 한다. 지금처럼 각자도생하는 사회는 사회가 아니다. 개미처럼 일해서 세금 내고 나라에서 하지 말라는 일은 하지 않으면서 착한 시민으로 살아가는 일이 자랑이 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의식개혁 사회개혁이 절실한 시절이다.
불합리한 세상을 바꾸고자 혜성처럼 나타났던 사람이 있다. 썩을 대로 썩은 부패한 나라를 과감하게 엎어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 백성을 구하고 했다. 고려의 왕들은 무능하고 부패했으며 관료들은 사리사욕에 눈멀어 있었다. 국교로 삼았던 불교는 권력의 아첨꾼이 되어 백성들을 농락하니 종교인들은 타락하고 백성은 살기 어려워졌다. 누군가 나라를 엎지 않으면 모두 망하고 말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다들 용기가 없었다. 젊고 유능하고 정의롭고 강직하고 패기 넘치는 신진사대부인 그가 앞에 나셨다.
성리학자 이색의 문하생으로 21살에 관직에 나갔고 북원의 사신을 맞이하는 문제로 권신들에게 맞서다가 나주로 유배를 가게 된 그는 그곳에서 세상의 불합리한 것들을 보고 백성들이 비참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혁명을 꿈꾸게 된다. 그런 꿈을 꾸던 중 왜구를 물리치고 황산대첩의 스타가 된 이성계와 손잡은 그는 역성혁명을 통해 새로운 나라 새로운 세상을 만들었다. 마침내 고려는 역사에서 막을 내리고 조선이 역사 앞에 등장한다. 조선은 철저하게 정도전이 기획하고 기틀을 잡아 화합과 상생의 정치를 펼칠 수 있는 밑바탕을 만들었다. 그는 조선 건국의 설계자이자 이성계의 조력자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게 된다. 그런데도 건국의 주역이었지만 큰 벼슬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자조’라는 시를 쓰게 된다.
몸과 마음 다해 살아보고자 애썼고
책 속 성현의 교훈 저버리지 않았다지만
삼십 년 긴 세월 고난 속에 쌓아온 업적
송정 정자 한 잔 술에 허사가 되었네.
젊은 개혁가인 정도전은 이미 자신의 시간은 가고 있음을 알았던 것일까. 조심하고 성찰했지만, 그동안 쌓아온 업적이 술 한 잔에 사라질 것을 직감했다. 역사는 그렇게 승자의 이름으로 쓰이게 마련인지 모른다. 자연계의 순리처럼 부질없이 사라지고 말 것을 정도전은 알았기에 이렇게 자조적인 시를 남겼을 것이다. 혁명의 동지였지만 혁명이 끝나고 평화가 오면 반드시 정적 제거에 나서는 것이 권력의 특성이다. 그는 젊은 개혁가답게 얼마나 열정을 가지고 새로운 국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했을까.
살아남기 위해 성현의 교훈도 저버리지 않고 몸과 마음을 다해 살았다. 이방원이 1차 왕자의 난을 치를 때 정도전은 늦은 밤에 경복궁 근처 송현마루에서 남은과 술잔을 기울이며 세상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때 정도전은 이방원이 보낸 사람들을 피해 옆집으로 도망을 갔다가 체포되었다. 이 시는 그때 지은 시다. 고난 속에 쌓아온 업적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상황에 맞닥트린 것이다. 누군가 죽어야 했으면 그 누군가는 정도전이 되어야 했다. 이방원에게 정도전은 반드시 제거해야 할 정적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목이 베여 죽임을 당하고 만다.
조선 건국의 실질적인 시조는 정도전이다. 그의 머리에서 건국의 밑그림이 나오고 아이디어가 나오고 추동력이 나왔다. 그뿐인가. 조선 최초의 헌법전 ‘조선경국전’도 그가 개인적으로 집필한 것이다. 그는 조선 건국의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까지 주도면밀하게 설계했다. 수도 서울을 동서남북으로 쭉 뻗는 도로와 도시의 구조를 만들고 사대문 안에 있는 경복궁을 비롯해 창덕궁 덕수궁 등 궁궐을 설계하고 가회동, 안국동 등 지명들도 그의 아이디어로 만들었다. 그는 조선을 건국하는 주인공으로 다재다능한 엔터테이너였다.
그런 그가 남긴 시 ‘자조’를 읽다 보면 삶이란 최선을 다할 뿐 나머지는 하늘의 몫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몸과 마음을 다해 살아가려고 애쓰지만, 인간은 그 애씀까지만 할 수 있고 나머지는 운명이 하는 것인지 모른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개혁가는 생과 사를 넘나드는 롤로코스터 같은 위험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렇다. 이 세상은 롤로코스터다. 인간의 잔혹함이 홀로코스터를 만들 뿐이다. 그는 이방원이 만든 홀로코스터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시 ‘자조’를 통해 죽음을 대하는 철학자적 관조가 보인다. 인간적이고 개혁적이었던 한 인간의 고뇌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는 말한다.
참으로 나약해 보이지만
더없이 끈질기고 강인한 존재
그것이 백성이다.
[이순영]
수필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