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석 칼럼] 둥지, 나를 내려놓다

허석

산어귀 미루나무 꼭대기에 까치가 집을 짓느라 분주하다. 지난가을 짝을 이뤄 사랑에 빠진 까치 부부가 산란을 위해 새집이 필요한 모양이다. 희망의 집인 셈이다. 엄동설한부터 시작한 기초공사가 초봄에 들어서야 완공의 결실이 보인다. 

 

굵고 단단한 나뭇가지로 골조를 세우더니 해토머리 새싹 잔가지를 엮어 커다란 밤송이처럼 쌓아 올렸다. 빗물에도 새끼가 젖지 않도록 틈새는 부드러운 풀이나 냇가의 찰진 흙으로 꼼꼼하게 메웠다. 그들에게 딱 필요한 만큼의 단칸방이다. 차디찬 허공을 가로질러 수백 번 재료를 주워 날라 만든 둥지이다.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르며 가족이 깃들이는 곳이다.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식구들을 보호하고 먹고 자고 생활하는 필수적인 주거 공간이다. 우리가 몸담고 부대끼며 사는 공간, 우리 삶의 배경이자 중심인 그곳, 집은 형태와 장소이자 살아가는 이유이며 의미가 되기도 한다. 알에서 깨어난 새는 그 둥지에서 편안하고 안전하게 성장하여 힘찬 날갯짓으로 자신의 세상을 향해 비상할 것이다.

 

예전에는 사람 사는 집도 새처럼 둥지 같았다. 그때의 집은 자연과 인간이 더불어 살며 안과 밖의 경계가 따로 없었다. 새벽을 알리는 장닭 울음소리와 함께 담장을 넘나드는 새들은 돌확 주위를 종종거리고, 나지막한 돌담에 호박넝쿨 부지런히 뻗어나가고, 양철지붕을 타고내리는 빗방울 속에 세상 풍경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었다. 집은 안식처였고 자연은 놀이터였다. 크고 작다거나, 좋고 나쁘다거나 구분이 없었다. 초가삼간이라도 산 같은 웅대함이 있었고 불편하기 그지없어도 어머니 같은 포근함이 있었다. 그야말로 보금자리였다.

 

집이 없어진 세상이다.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여 교도소처럼 갇혀버렸다. 비가 오는지 눈이 오는지도 모르고 사람 사는 인기척도 들리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집은 사회적 가치와 부의 기준을 앞세워 사람 사는 집의 소중한 의미를 잃어버렸다. 신분과 계급의 표지이고 차별과 분별의 표상이 되어버렸다. 나 자신에게, 가족에게 얼마나 평안하냐가 아니라 사회생활에 얼마나 편리하냐의 잣대로만 열려 있는 집이다. 돈에 따라 언제든 옮길 수 있는 우리는 한곳에 마음 편하게 정착하지 못하는 유목민의 삶이 된 것은 아닐까.

 

내 집에서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하고 살았다. 집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4형제의 장남인 탓에 결혼해서도 서울살이하는 동생들과 한집에서 생활하느라 불편이 컸기 때문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동생들이 하나둘 결혼 후 분가를 할 때쯤에는 시골의 부모님이 상경하셔서 또 함께 살았다. 하숙집 같았고 임시로 잠시 머무는 간이역 같았다. 작고 아담할지라도 독립적인 ‘우리’만의 공간을 갖고 싶었다. 분가해서 내 식구하고만 살면 더없이 오붓하고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주택이 아니라 둥지며 보금자리를 갖고 싶었다. 

 

이상적인 집을 꿈꾸었다. 몸의 쉼터이고 마음의 숨터이기를 기대했다. 내가 어떤 무람없는 짓을 해도 흉이나 흠이 되지 않고, 누구로부터 간섭받거나 눈치도 보지 않는 집이었으면 했다. 바깥에서는 힘들게 일해도 집에 돌아오는 순간 오롯이 나다운 공간을 만끽하며 위로받고 싶었다. 그 배경 속에 가족이 있고 시간과 공간과 풍경, 웃음과 미래와 이야기가 잉태되기를 바랐다. 가족의 역사와 추억이 있어 함부로 고치거나 부술 수 없는, 오래 묵은 손때와 흔적이 새것보다 더 좋은, 아무리 멀리 떠나있어도 언젠가 되돌아가고 싶은 그리움이 있는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어렵게 분가했다. 그런데 기분이 이상했다. 우리 가족만이 사는 집, 오로지 내 힘으로 구매한 집이라 더할 나위 없이 만족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 빈자리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몸과 습관은 편리함에 익숙해지었지만 그렇다고 마땅히 편안하다거나 행복하다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내 집을 갖고서도 남의 집처럼 마음은 늘 안착하지 못하고 언제든지 떠날 채비를 갖추고 있는 것처럼 풀지 않은 이삿짐 같았다. 둥지에 살면서도 남의 둥지인 듯 불안한 기분이었다.

 

어느새 은퇴 나이를 지났다. 바쁜 생활도 없어지고 앞만 보고 달리던 인생길도 가끔 되돌아보곤 하는 나이가 되었다. 욕망이나 집착도 줄어들어 내게 지금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의 분별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고급스럽고 멋있는 것에 유혹당하지도 않고, 가진 것 잃을까 봐 두려워하지도 않고, 경쟁에서 뒤처질까 봐 조바심 내지도 않는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사는 삶이 된 모양이다. 

 

이제는 자식들도 분가하고 홀로 산다. 시골의 작은 촌집이라 소소한 것 하나도 일일이 직접 손보아야 한다. 그런데도 마음은 편하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불편해도 귀찮지 않다. 가능하면 쉽고, 간편하고, 천천히 살려고 한다. 너무 빨리 달려 내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 봐 가끔 말에서 내려 되돌아본다는 인디언처럼 산다. 알고도 모르는 척, 듣고도 못 들은 척 세상에 여유를 부릴 줄도 안다. 

 

게으름 피우고, 낮잠 자고, 공상에 잠기고, 책 읽고, 멍하니 하늘 쳐다보고, 고독도 즐기고, 좋아하는 음식도 만들어 먹으며 단순한 일상을 즐기며 산다. 모든 시간이 오롯이 나에게만 충실하다. 그동안 살면서 가끔 울고 싶은 적도 있었고 나만의 동굴에 들어가 잠시 나를 추스르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이제야 가능한 일이 되었다. 내가 살던 곳, 내 자리가 고통도 구속도 아니었지만 나를 위해 시간을 낼 수 없었다는 것이 내 삶을 은연중에 속박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작고 불편하지만 아쉬움이 없는, 지금의 생활이 내 집은 아니어도 오히려 내 집처럼 편하다.

 

그 편함이 혼자만의 생활이거나 시골에 살아서가 아님을 안다. 까치가 둥지에서 새끼를 보호하고 키우는 것처럼 그 책임과 역할에 사뭇 긴장하며 사느라 마음의 짐을 내려놓지 못한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지나온 세월 발버둥 치며 살았다고 후회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지금 느끼는 안식과 여유도 땀 흘려 일한 뒤에 오는 달콤한 휴식처럼, 그렇게 악착같이 살아내는 과정이 있었기에 모두 내려놓고 조금은 담담하게 내게로 돌아설 수 있는 것 아닐까.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가족과 함께하는 성장 과정마저 없었다면 세상살이에 공짜로 탑승한 승차권처럼 무의미하지 않았을까 싶다.

 

내 집, 좋은 집, 편리한 집이 문제가 아니었다. 비싼 것보다 내게 귀한 것이 명품이 되듯 지나온 모든 일상의 일들을 내가 가질 수 있는 행복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마음가짐이 문제였다. 집에 기대했던 욕망을 비워내고 그 자리에 내 삶에 의미와 가치 있는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반추해보는 나날이다.

 

[허석]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저서 : [꿈틀, 삶이 지나간다]

[그 남편, 그 아내]

[시간 밖의 시간으로]

[삶, 그 의미 속으로]

천강문학상 수상

등대문학상 수상

흑구문학상 수상

선수필문학상 수상

원종린수필문학상 수상

이메일 :sukhur99@naver.com

 

작성 2023.08.29 09:38 수정 2023.08.29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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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