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석 칼럼] 등받이

허석

등을 기댄다. 창문을 넘어 들어온 햇볕 자리가 벽을 타고 꺾은선그래프로 등을 기대어 온다. 중후한 첼로 선율이 가난한 등줄기를 어루만지며 몸속 깊숙이 들어와 심상의 현을 울린다. 몸을 살며시 뒤로 젖혀본다. 벌러덩 넘어진다. 등받이 없는 동그란 벤치였음을 그제야 깨닫는다. 허공 하나가 거기 있다.

 

믿음이었다. 온몸을 내맡겨 의탁하고 싶은, 떠난 지 오래된 고향이지만 누군가 달려 나와 반겨줄 것 같은 그리움이었다. 자전거를 배울 때 뒤에서 붙들고 있다는 믿음이 있기에 손을 놓아도 넘어지지 않는 것처럼.

 

꼿꼿한 허리로 앉아야 하는 것은 언제나 불편한 일이다. 수직의 독립성이 주는 불안감이고, 힘주어 척추를 곧추세워야 하는 경직과 긴장감이다. 등받이의 존재 여부는 결핍감에서 여유로, 단절감에서 교감으로 무게중심의 이동이다. 나무처럼 직립으로 버텨야 하는 것들은 모두 외로운 존재들이다.

 

동네 구석진 골목에 허름한 선술집이 있었다. 아주 작은 평수만큼이나 살림도 가난해서 의자마다 그 높낮이나 모양새가 서로 달랐다. 앉을 때마다 마음 심지가 변덕을 부렸다. 약간 높거나 등받이가 있는 의자에 앉을 때는 괜히 자신감이 생기고, 목소리도 커지고, 웃음이 많아졌다. 

 

그런데 의자가 낮거나 등받이가 없을 때는 자꾸 움츠러들고, 세상이 힘들어지고, 심드렁한 심사에 사로잡혔다.

한 여자를 사랑했다. 세상 사는데 무거움과 어려움이 없었다. 삶의 기준이 명쾌하고 의지가 명료했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길을 잃어도 두렵지 않았다. 그녀에게 등을 기대면 잎새 무성한 동네 정자나무처럼 안락하고 평화로웠다. 그녀의 존재는 살아가는 힘이고, 동기부여이고, 먼 미래를 꿈꾸는 무지개와 마찬가지였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유심히 본다. 저마다의 등은 소리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자신감에 들뜬 듯 꼿꼿한 모습이기도 하고 좌절감에 무너질 것 같은 굽은 등이기도 하다. 등은 자기 삶의 또 다른 얼굴이고 이력이다. 앙다문 마음들이 박혀 있고, 눈물 어린 순간들도 그 속에 숨어있다.

 

삶이 고달플 때마다 뒤를 돌아다보았다. 세상은 나를 알아주지 않고 하는 일은 불여의하기만 해서 실망감만 앞서던 때가 있었다. 지치고 외로운 심신을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었다. 누군가가 나의 등을 어루만지고 귀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안정과 위안이 될 것 같았다. 그때마다 등 돌리지 않고 내 편이 되어주고 나의 슬픔과 아픔을 감싸고 보듬어 준 것은 사랑의 등받이였다.

 

항상 사랑을 받고 있으면 그 누군가의 존재마저도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늘 채워져 왔던 그 자리가 비어있을 때의 허전함이 찾아오는 순간이 있다. 그제야 그것이 나를 지켜왔던 등대였음을, 삶의 빼놓을 수 없는 지주대였음을 비로소 인식하게 되었다. ‘아! 이제는 정말 혼자구나.’ 하고 등짝에서 한기를 느꼈던 것은 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였다.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벌써 부모님을 잃었다. 보호받아야 할 소년 시절에 자신을 책임지기 위해 고향을 떠나 세상 속으로 뛰어들었다. 공장에서 온종일 궂은일에 매달리며 땀 흘려 일해도 저녁이면 돌아갈 집도, 반겨줄 가족도 없었다. 밤마다 들판에 누워 풀벌레 울음보다 적멸한 마음을 혼자 이겨내야만 했다.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그 사랑의 보살핌에 평생이 목말랐을 것이다. 지치고 외로웠을 때 달려가 안길 포근한 품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몸 하나 기댈 곳이 없는 독립자의 삶이 얼마나 고단하고 황량했을까. 아버지의 옹이 진 가슴앓이를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 참으로 죄스럽다. 

 

자식들은 무관심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지금은 힘겹다는 변명으로 주위만 맴도느라 언제나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깃털처럼 몸이 가벼워졌을 때도 널찍한 등판 한번 내보이며 아버지를 업어보지도 못했다. 퇴근길에 간이역마냥 멈춰 서던 장명등 기둥, 응등그러진 어깨 살며시 기대어보는 유일한 등받이였을 것이다.

 

등받이는 말없이 수고와 고통을 감당한다. 지친 자에게 쉼터이고, 힘든 자에게 안녕과 위안의 방패막이가 된다. 기울면 기울수록 탄력 좋은 용수철처럼 든든한 버팀목이고 지지대의 역할을 한다. 중심을 잃고 추락하는 영혼들의 바지랑대가 되고 가야 할 길을 가리키는 안내판이 되기도 한다. 밝지만 그림자를 드리우는 햇빛이 아니라 어둠으로부터 해방해주는 달과 같은 존재이다.

 

우리는 등을 기대고 의지하며 살아왔다. 유아 시절에는 어머니의 등을 빌려 세상 구경을 하였고 형제 많은 집에서는 누이의 등에 따개비처럼 붙어서 친구들과 노는 법을 배웠다. 누구라도 혼자 떠도는 세상이 아닐 것이다. 혼자 힘으로 삶을 헤쳐나가는 듯 자신하지만 보이지 않는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서로 의지하며 동행자로 살아가고 있다. 

 

힘겨워 기대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그가 의지할 등 한쪽을 흔쾌히 내어주고, 내가 지쳤을 때 그의 등을 빌어 위로받을 수 있다면 더없이 균형 있는 삶이 되리라. 더위에 기진한 사람들을 위한 그늘이 되고, 삭풍에 휘청대는 사람에게 바람막이가 한 번쯤 되어줄 수 있다면 더없이 행복한 삶이 될 것 같다.

 

등을 기댄다. 사랑과 믿음이 등줄기를 파고든다. 새털구름 사이로 황홀한 석양빛이 허공에 길을 내며 총총히 걷고 있다. 거기 등받이가 있다.

 

 

[허석]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저서 : [꿈틀, 삶이 지나간다]

[그 남편, 그 아내]

[시간 밖의 시간으로]

[삶, 그 의미 속으로]

천강문학상 수상

등대문학상 수상

흑구문학상 수상

선수필문학상 수상

원종린수필문학상 수상

이메일 :sukhur99@naver.com 

 

작성 2023.09.05 09:22 수정 2023.09.05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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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