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영의 낭만詩객] 초혼

이순영

그리워서 너무 그리워서 죽을 것 같은 그런 사랑이 있을까. 죽은 이의 혼을 불러드릴 만큼 절망스럽고 간절한 그리움이 있기는 하는 걸까.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정 중에 가장 고통스러운 감정이 그리움이라면 그건 신이 인간에게 준 사랑일지 모른다. 인간은 그리움을 통해 고독의 끝을 경험하고 정신적 성장을 하며 극한의 사랑을 통찰한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은 이 그리움을 통해 사랑으로 성장한다. 일회용 사랑이 넘쳐나고 즉석 사랑을 자랑하는 요즘 젊은이들의 머릿속에는 아마 그리움이란 단어는 사어가 되었거나 책에서나 보는 것일지 모른다. 그 고결하고 아름답고 처절한 그리움에 왈칵 눈물을 쏟아본 사람들은 소월의 ‘초혼’을 모를 리 없다. 초혼을 나직이 읊조리며 젊은 날을 보냈을 것이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빗겨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소월이 누구던가. 젊은 날 소월 시 한 편 읽지 않고 늙은 사람이 있던가. 가난하고 절망스러운 식민지 백성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위로한 소월이다. 저 산골짝마다 들판마다 그저 소처럼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의 냄새가 짙게 배 있는 시가 소월의 시다. 소월의 시에는 잘난 척이 없다. 어려운 수사도 없다. 추상적인 관념도 없다. 있는 그대로 향토적인 체취가 묻어나 마치 내 이야기 같은 정서적 동질성을 느낄 수 있다. 쉽고 간결하고 아름다운 우리말이 주는 언어의 힘에 저절로 감동하게 된다. 시의 힘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 시대 그 시절의 아픔을 맑은 호수처럼 비춰주고 있다.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을 설움에 겹도록 부르다가 내가 죽을 만큼의 그리움은 우리 가슴 저 깊은 곳에 박혀 있는 사랑이다. 이 절절한 사랑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죽은 혼이라도 불러야 하는 마음을 이해하고도 남는다. 떠난 혼을 불러들이는 우리 전통 상례의 고복의식(皐復儀式)을 통해 다시 살려내려는 간절한 소망을 노래하고 있다. 무엇이 그토록 간절했던 것일까. 서른세 살의 젊은 나이에 병사로 세상을 뜬 소월이기에 초혼은 더욱 애달프고 애달프게 다가온다. 류머티즘으로 고생만 하다가 죽기 이틀 전에 “여보, 세상은 참 살기 힘든 것 같구려”라며 쓸쓸히 웃으며 우울해했는데 결국 1934년 12월 24일 평안북도 곽산에서 뇌졸중으로 죽고 말았다.

 

인간의 직관과 감정은 알고리즘에 없는 간절한 그리움을 불러오는 때가 온다. 그 그리움은 공존의 체계에서 인간다운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인간의 내면에 스며든다. 현대인들은 그저 노력 없이 알고리즘이 이어주는 감정과 이성과 사상으로 편하게 세상을 유영한다. 그러나 감성과 성찰과 직관으로 써낸 시인들의 시는 호르몬과 자율교감의 세포 하나하나까지 파고들어 알고리즘이 하지 못하는 인간의 정신을 말끔하게 씻어준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선 채로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그 이름이여’를 읊조리며 흘리는 한 방울의 눈물에 존재의 처절함과 위대함은 한 편의 시가 주는 힘이다.

 

배고프고 외로운 직업인 ‘시인’이 날줄과 씨줄로 짜낸 시는 시대의 자화상이며 삶의 지혜다. 이 대책 없는 직업인 시인을 감히 누가 하려고 할까. 소월은 이 고단한 직업인 시인을 통해서 민족의 고통을 시로 승화시키고 민중에게 희망이라는 지렛대 만들어주었다. 이것이면 됐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일제 식민지 시절 시단에서는 ‘조선주의’가 유행했다. 그러나 소월은 조선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도 조선팔도에 있는 자연을 통해 민중의 말을 시어로 승화시키고 우리라는 공동체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어둡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모퉁이에서 한 시인이 만들어 낸 시는 향토시의 표준이 된 것이다.

 

소월의 시를 읽으면 그에게 매료당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내 이야기 같기 때문이다. 내 생각, 내 사유, 내 추억이 그의 시에서 묻어난다. ‘진달래’가 그렇고 ‘엄마야 누나야’가 그렇고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가 그렇고 ‘접동새’가 그렇고 ‘먼 후일’이 그렇고 ‘초혼’이 그렇다. 나는 이 고독하고 외롭고 쓸쓸한 시인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 그의 슬픔과 사랑을 외면하지 않고 오래도록 내 기억의 한쪽에 저장해 두고 추운 겨울 단무지를 꺼내 썰어서 흰쌀밥에 얹혀 먹듯 그의 시를 두고두고 먹어볼 것이다. 

 

소월의 시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의 시간과 나의 시간은 평행을 이루고 있다.

 

 

[이순영]

수필가

칼럼니스트

이메일eee0411@yahoo.com

작성 2023.09.21 09:34 수정 2023.09.21 09:42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한별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1/1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Shorts 동영상 더보기
광주루프탑카페 숲안에 문화복합공간 #로컬비즈니스탐험대 #우산동카페 #광주..
2025년 4월 25일
2025년 4월 25일
전염이 잘 되는 눈병! 유행성 각결막염!! #shorts #쇼츠
2025년 4월 24일
2025년 4월 23일
2025년 4월 22일
나는 지금 '행복하다'
2025년 4월 21일
2025년 4월 20일
2025년 4월 19일
2025년 4월 18일
2025년 4월 17일
2025년 4월 17일
2025년 4월 16일
2025년 4월 15일
2025년 4월 14일
2025년 4월 13일
2025년 4월 13일
2025년 4월 13일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