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명희의 인간로드] 도교의 창시자 ‘노자’

전명희

나는 이천육백여 년 전 인간 ‘노자’다. 나는 허난성 주구시 루이현 오얏나무 아래에서 태어났다. 오얏나무 아래에서 태어나서 이(李)라는 성에 이름은 이(耳)라고 지었다고 한다. 내 고향은 살기 좋기로 이름난 곳이다. 산과 들이 조화를 이루어 자연은 순하고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쿤룬산맥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이 뱀처럼 너른 들을 구불거리며 흐르다가 깊은 협곡을 만나 폭포수가 되어 떨어진다. 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가파른 산맥을 지나 사막을 적시다가 남쪽으로 달려서 황토를 밀고 오는 황허강이 흐르는 곳이 내가 태어난 곳이다. 세상은 세력을 넓히려는 정치가들의 야망으로 시끄러웠지만 나는 이렇게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에서 큰 근심 없이 살며 좋아하는 공부에 매진했다. 

 

나처럼 공부를 좋아하는 학자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펼치는 시절에 접어들었다. 그래서 많은 학파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예약과 인의를 중심으로 학문하는 유가(儒家)파가 이름을 떨치고 있었고 법에 따른 엄격한 통치 확립을 통해 왕의 권위와 세력을 유지하자는 법가(法家)파도 정치적 성과를 내고 있었다. 또한 사치와 낭비를 죄악시하고 차별 없는 사랑과 전쟁을 반대하는 묵가(墨家)파도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나처럼 법가의 가혹한 법령을 반대하고 무위자연을 주장하는 도가(道家)파도 정신적으로 빈곤한 사람들에게 인간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촉구해 많은 지지를 얻고 있었다. 

 

제자백가들은 사회적으로나 정치적 또는 사상적으로뿐만 아니라 농사법에도 영향을 끼치고 지리 연구도 했으며 모여서 학술 대회를 열어 자신들의 역량을 드높이기도 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상상력을 창조하는 문학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는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실력 본위의 자유로운 사상을 펼치고 뛰어난 인재를 발굴하고 등용하는데 나를 비롯한 제자백가들이 사회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나는 사람들과 어울림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세상과 담을 쌓고 은자(隱子)로 살며 학문에만 매달렸다. 사람들은 나를 잘 알지 못했고 나도 세상을 잘 알지 못했지만, 학문은 세상과 나를 이어주는 소통의 도구였기에 학문하는 즐거움으로 살아갔다. 

 

나는 초(楚)나라에서 태났지만, 주(周)나라의 백성이 되었다. 세상은 힘을 가진 무리들이 서로 싸우며 패권전쟁이 일으켰다. 그중에 오패(五覇)가 나타나 세상을 뒤집어 놓더니 또 칠웅(七雄)이라 불리는 강국들이 서로 싸웠다. 그 와중에 나는 주왕조의 백성으로 살아가면서 수장실(守藏室)인 국립중앙도서관 관장으로 근무했다. 수장실에 근무하는 것은 나에게 엄청난 일이었다. 수장실에 있는 장서들을 모두 읽어볼 수 있는 특혜뿐만 아니라 조상들의 유물과 마주하며 과거의 시간과 대화도 할 수 있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우주와 자연에 대한 학문이 더 넓어지고 사람에 대한 인본주의도 더 깊어졌다.

 

한 번은 어디서 내 소문을 들었는지 노나라의 법무부 장관을 지낸 공자가 찾아왔다. 공자는 주나라에 잠깐 머물고 있다며 나에게 배움을 얻고자 찾아왔노라고 말했다. 제자 몇 명과 같이 온 공자는 나를 공손하게 대하며 하늘이 무엇인지 땅이 무엇인지 사람이 무엇인지에 대해 물었다. 특히 공자는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고 사람이 살아가는 길이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끝없는 지적 호기심이 넘쳐났다. 평생 학문에 매진한 공자의 가르침은 이미 세상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정보를 접했던지라 나는 공자에 대한 가르침을 주는 것에 대해 큰 거부감은 없었다. 그렇게 담소를 나누다가 공자는 돌아갔다. 

 

나는 공자에 대한 평을 해달라는 기록관에게 크게 평을 할만한 게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록관은 기록을 남겨야 한다며 내 평가를 재촉했다. 주나라의 녹을 먹고 사는 공무원인 나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에 보태거나 빼지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 “공자는 사기꾼 같은 면이 있고 위선자 같은 사람이다” 이렇게 평하자 기록관은 그대로 기록해서 수장실(守藏室)에 보관했다. 나는 공자와의 만남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공자는 이 나라 저 나라 떠돌아다니며 민심을 살피고 자신의 공부를 널리 펴고 있는 떠돌이 사상가다. 몸도 힘들고, 마음도 힘들겠지만, 그 또한 자신의 사상을 펼치는 방법이니 이 시대를 앞서 나간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도’란 아주 쉬운 학문이다. 억지로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도’다. 도는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것이다. 사람이 자연을 지배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 명성이나 재물을 가득 채우면 그 다음에는 잃어버릴 일만 남게 된다. 그러므로 항상 비어 있어야 하는 것이 ‘도’다. ‘도’는 항상 물과 같아서 조건 없이 모습을 바꾸며 적응한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약하고 순할지언정 공격하지 않는 것이 물이다. 물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만 오만하지 않고 겸손하다. 물처럼 자연스럽게 사는 삶이야말로 ‘도’라는 걸 알아야 한다. 이것이 ‘도’의 학문이다. 도는 하나를 생성하고 하나는 둘을 생성하고 둘은 셋을 생성하고 셋은 만물을 생성하는 것이 우주라는 걸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 

 

나는 도서관에 근무하면서 학문하는 즐거움을 맛보았으며 그 즐거움으로 사상과 철학의 금자탑을 쌓아 올렸다. 이제 퇴직할 나이가 되어 서쪽으로 가 은거하기로 결심했다. 짐을 챙겨 수장실(守藏室)을 떠나려고 관문을 나서려는데 문지기인 윤희가 가로막으며 간곡하게 내게 청이 있다고 했다. 

 

“선생님 이제 곧 은거에 들어가실 테니 어려운 부탁이지만 떠나시기 전에 저를 위해 글을 남겨주시고 가시면 영영 잊지 않겠습니다”

 

나는 난감했다. 어려운 부탁이라는 건 문지기 윤희도 알고 나도 아는 사실이다. 왜냐면 나는 평소에도 언어를 통해서는 ‘도’에 도달할 수 없다고 강조했기에 글을 남기지 않았었다. 학문이나 책을 읽은 똑똑한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을 선동하기 좋아하므로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것은 ‘도’가 아니라고 설파했었다. 세상을 판단할 기준이나 비교를 두지 않는 것이 나의 철학인데 문지기 윤희의 저 간절한 눈빛을 보니 마음이 흔들렸다. 나는 한참 고민하다가 윤희의 부탁을 받아들여 사람이 살아가는 ‘도’와 ‘덕’에 대해 오천 자쯤 말해 주었다. 

 

나는 윤희에게 

나의 철학을 전해주고 

소를 타고 느릿느릿 서쪽을 향해 걸어갔다. 

 

[전명희]

서울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다 그만두고

‘밖철학연구소’를 설립해 연구에 몰두했지만

철학 없는 철학이 진정한 철학임을 깨달아

자유로운 떠돌이 여행자가 된 무소유이스트

이메일 jmh1016@yahoo.com 

작성 2023.10.02 11:19 수정 2023.10.02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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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