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해 여름과 그때의 추억이 고스란히 다시 떠오르는 것이다. 안, 안! 나는 어둠 속에서 아주 나직하게 아주 오랫동안 그 이름을 부른다. 그러면 내 안에서 무엇인가가 솟아오른다. 나는 두 눈을 감은 채 이름을 불러 그것을 맞으며 인사를 건넨다. 슬픔이여 안녕.
- 프랑수아즈 사강,『슬픔이여 안녕』에서
나는 오랫동안 ‘슬픔이여 안녕’ 슬픔들을 떠나보냈다. 내 안의 깊은 어둠 속으로 꾸역꾸역 들여보냈다. 내 안에 켜켜이 쌓인 슬픔들, 나는 슬픔들이 터져 나오지 않도록 항상 몸을 움츠려야 했다.
나는 인생의 중반 30대가 되기까지 철모르던 어린 시절 외에는 단 한 번도 운 적이 없다. 어린 내가 울 때마다 어머니는 남자는 우는 게 아니라며 울음을 그칠 때까지 때렸다.
나는 그 후 죽 씩씩한 남자로 자랐다. 집에 와도 딱딱한 얼굴 근육은 풀리지 않았다. 그렇게 인생의 전반부를 보냈다. 전반부를 넘어가는 30대 중반, 나는 돌멩이처럼 딱딱하게 굳은 몸으로 하늘을 보았다.
‘이대로 살 수는 없어!’ 무작정 세상 밖으로 뛰쳐나갔다. 문학 공부를 하며, 갑자기 슬픔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나는 슬픔을 맞이한 게 아니었다. 슬픔의 강물에 잠겨 버렸다. 프랑스의 소설가 프랑수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을 읽으며 생각한다.
어느 날 밤, 주인공 17세 소녀 세실은 ‘슬픔이여 안녕’ 슬픔을 맞이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애인을 죽게 한 그해 여름의 추억이 고스란히 떠올랐던 것이다. ‘안, 안! 나는 어둠 속에서 아주 나직하게 아주 오랫동안 그 이름을 부른다. 그러면 내 안에서 무엇인가가 솟아오른다. 나는 두 눈을 감은 채 이름을 불러 그것을 맞으며 인사를 건넨다. 슬픔이여 안녕.’
인생이 갈라지는 지점이 바로 이 지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슬픔이여 안녕’ 슬픔을 맞이하느냐? 슬픔을 떠나보내느냐? 슬픔을 떠나보내면, 슬픔은 허공으로 날아가지 않는다. 바람을 타고 우리 안으로 들어온다.
우리 안에 켜켜이 쌓인다. 슬픔은 어느 날, 악마가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난다. 우리는 그를 맞이해야 한다. 괴테의 ‘파우스트’처럼. 악마는 말한다.
“나는 악을 추구하지만 선을 이룩하는 힘의 일부다.”
나는 악마를 맞이했다. 악마와 오랫동안 동행했다. 그는 그의 길을 떠나고, 나는 나의 선을 이룩하게 되었다. 나는 인문학을 공부하며 글을 썼기에 나의 오랜 슬픔들과 만나고 무사히 헤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슬픔을 맞이하지 않고 계속 외면하게 되면, 슬픔은 우리의 깊은 내면에서 죽음의 독소를 뿜어내게 된다.
삶이 언제나 즐겁기만 하다면
우리 영혼은
차라리 슬픔의 고요한 품속
허탈한 웃음에서 휴식을 찾을 겁니다
- 헨리 벤 다이크, <하늘에 온통 햇빛만 가득하다면> 부분
슬픔을 맞이하면, 슬픔은 끝내 우리의 영혼을 깨운다.
슬픔을 꼭꼭 숨겨 두면, 영혼은 그 안에 갇혀 질식하고 만다.
슬픔은 끝내 선을 이룩하는 힘이다.
[고석근]
수필가
인문학 강사
한국산문 신인상
제6회 민들레문학상 수상.
이메일: ksk21ccc-@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