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선 칼럼]  공명, 동조화 현상에서 배우는 인생의 묘미

제5회 코스미안상 은상

[당선소감]

 

공명, 동조화 현상을 늘 긍정의 눈으로만 보아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편향된 사고, 집단 이기주의를 직면하면서 공명, 동조화 현상이 그런 문제의 늪에 빠지게 하는 원인 중 하나로 보였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는 글로 인정받은 것 같아서 매우 기쁩니다.

 

그 누구라도 타인에게 인정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존재라 여기니, 영광스러운 수상 소식에 좋아라 방방 뛴 부끄러움이 조금은 줄어듭니다.

 

심사해 주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더 좋은 글을 써야겠다는 의욕이 솟구칩니다. 부단히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5회 코스미안상 은상 - 공명, 동조화 현상에서 배우는 인생의 묘미

 

쇠막대로 소리굽쇠를 한 대 툭 친다. 소리굽쇠는 내 바람에 보답이라도 하듯 윙윙 소리를 낸다. 옆에 나란히 있던 소리굽쇠는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친구 따라 강남 가듯 따라서 운다. 끼리끼리 감정을 나누는 끈끈한 울림이 진하게 느껴진다.

 

바닷가의 소라 껍데기를 주워서 귀에 대면 파도 소리가 쏴 쏴 들린다. 분명 소라 속이 텅 비어있음에도 소리가 난다. 그 어떤 자연의 소리가 소라 껍데기의 모양과 부피에 딱 맞는 진동을 나누는 걸까. 이렇게 같이 울어주는 친구가 늘 곁에 있으니 소라 껍데기는 얼마나 행복할까.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다. 소라 껍데기에서 나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참 듣기가 좋다. 나를 미소 짓게 하고 때로는 가슴을 짜릿하게도 해준다. 내 가슴속 깊은 곳까지 소라 껍데기의 행복이 전이되어서 그런가 보다.

 

영국 군인들은 다리 위에서만큼은 절대 행진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른발, 왼발, 오른발, 왼발, 딱딱 발을 맞추어 행진하다가는 다리 붕괴 사고를 당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1831년에 영국 북부의 현수교에서 발맞추어 지나가는 수많은 군인 무리의 행진으로 인해 다리가 무너진 일이 있다. 그 당시 육십여 명의 인명피해가 났다. 다리 상판의 진동과 군인의 행진 사이클이 우연히 같게 되면서 다리는 주체할 수 없이 요동쳤으리라. 같은 진동을 만나면 흔들림이 더욱 거세지는 공명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확실히 보여준 사건이다. 

 

소리 울림으로 와인잔을 퍽하고 깨뜨리는 실험 장면만 떠올려 봐도 공명의 힘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진동이 달랐더라면 그 힘은 분쇄되어 약해졌을 터이다. 공명 현상들이 우리에게 같음의 가치를 일깨워 주는 듯하다. 

 

메트로놈은 처음 정해준 속도에 맞게 좌우로 움직이는 박자기로서, 혼자서는 절대 박자를 바꾸지 않는다. 하지만 메트로놈 여러 개가 같은 테이블 위에서 함께 움직일 때는 그 태도가 달라진다. 처음엔 각각의 속도가 다르니 처그득 척, 치그 척, 치그덕 저마다 움직일 때 내는 소리가 중구난방이다. 그러다가 점점 옆 친구랑 맞춰간다. 그 속도가 척척 맞아지는 메트로놈이 하나둘 생겨나다가 점점 늘어난다. 

 

시간이 더 지나면서 끝까지 동조하지 않고 혼자 버티던 마지막 메트로놈마저 대세의 속도에 맞춘다. 결국엔 전체가 동시에 일사분란하게 척! 척! 척! 척! 한 속도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수백 대로 실험해도 그 결과는 마찬가지다. 공명에 의해 동조화가 이루어지는 이런 실험을 보면서 우리 인간들의 세상사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빨강 신호등임에도 길을 건너가는 사람이 한두 명일 때는 옆에 있던 사람들이 따라 하지 않고 제 자리에서 파란 신호를 잘 기다린다. 하지만 세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런 행동을 하면 주변인들도 따라서 같이 건너가는 경향이 생긴다. 이런 실험 장면은 TV에서도 봤지만, 실제로도 흔히 목격되는 일이기도 하다. 

 

대학생을 대상으로 인간의 동조화 현상 실험을 한 예가 있다. 일곱 명의 대학생에게 길이가 다른 A, B, C, D 네 개의 선을 보여주고 어느 선이 가장 짧은지 물어보는 실험이다. 누가 봐도 정답은 A다. 하지만 여섯 명의 학생이 모두 미리 짜고서 B라고 대답을 하면 일곱 번째 마지막 학생은 의아해하면서도 처음엔 소신껏 A라고 정답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문제를 계속해서 풀다 보면 결국엔 다수가 답한 오답을 말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실험이다. 내가 저 실험의 대상자였더라면 절대로 오답을 말하지 않고 끝까지 정답만을 이야기할 것 같다. 그런데 실험자를 바꾸어가며 같은 실험을 했을 때 실험 대상 참가자 대부분이 결국은 오답을 말했다는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나왔다. 이 사례를 보면,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는 일도 아닌 모양이다. 

 

모두가 “예스”라고 할 때 끝까지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소신이 뚜렷한 사람으로 보이기도 하고 고집불통의 황소고집으로 보일 수도 있을 터이다. 인간의 동조현상 실험을 보면서 사람들은 불편한 관계가 싫어서 그냥 따르는 듯 보인다. 결국 집단이 개인의 생각을 쉽게 바꾸어 버리니, 여러 사람이 한 사람 바보 만들기 참 식은 죽 먹기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이는 집단 내 의사 결정 시에도 자신의 소신을 제대로 밝히지 못할 확률이 매우 높을 수 있음을 방증한다.

 

세상살이에서 어느 게 옳다고 단정할 수 없을 것이다. 공명으로 동조화가 일어나는 현상을 서로 공감하며 마음을 맞추는 긍정적인 면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수의 의견에 그냥 묻혀 그저 편하고자 하는 잘못된 측면이 더 부각되어 보인다. 소신 없이 따르기만 하다 보면 점점 더 왜곡된 시선에 사로잡힐 수 있고, 옆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일이 태반일 듯싶다.

 

요즘은 알고리즘이라는 것이 개인의 취향을 희한하게 잘 알고 덤비니, 강력한 추천 파도를 넘어서질 못하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양쪽을 못 보고 한쪽으로 편향되기 딱 좋은 세월 속에 사는 것 같다. 특히 판단력이 미숙한 어린이, 청소년들이 더 걱정이다. 정보의 바닷속에서 끼리끼리 한 쪽으로 몰려다닌다. 

 

함께하니 얼마나 위로가 되고 힘이 될까. 하지만 다른 쪽은 보지 못한다. 아니, 보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아예 안 보는 것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 성싶다. 생각이 다르거나 다른 판단이 일어날 때 생길 수 있는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는 건 아닐까. 생각이 다른 집단에 대해서는 적대감마저 가지는 듯하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룹 속에서 동조화가 훨씬 편하게 느껴지는 삶을 사는 데 익숙해져 버리는 것이 아닐까. 

 

무생물조차도 공명이니 동조화에 익숙해져 있지 않은가. 그러니 세상사로 고달픈 우리 인간들의 공명과 동조화 현상에 대해 누가 뭐라 탓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처럼 당연지사 아닐까 싶다가도 한편으론 걱정이 슬슬 올라온다. 

 

협력이 매우 중요한 시대에 살면서 공명과 동조화 이상으로 더 중요한 게 어디 있을까. 그렇다. 어울리는 사람들 간의 협력과 단결, 좋은 분위기 형성을 위해서는 공감하고 따르는 행동이 무엇보다 필요할 터이다. 지금까지 그럭저럭 나도 주변에 동조하며 잘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그런데 불현듯 왜 이런 상념에 빠져드는 걸까. 걱정을 떨쳐 버리려고 해도 그게 쉽지가 않다. 

 

소라 껍데기의 공명 소리에 그저 감탄하고 미소 짓던 내가 아니었던가. 나의 마음속 깊이 지니고 있던 그 행복감은 어디로 숨어 버렸는가. 그 자리에서 불편한 노파심이 퉁퉁거리며 마구 올라오니, 메트로놈의 동조화 현상도, 사람의 동조화 관찰 결과도 같음의 가치를 자꾸 걱정의 눈으로 들여다보게 만든다. 과연 우리 이대로 괜찮다고 할 수 있을까?

 

같음의 가치가 집단의 응집력을 높이는 장점만 지녔다면 얼마나 좋을까. 비판 없이 동의하는 동조현상, 애쉬 효과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생각에 염려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집단 내에서 의사 결정은 그 집단의 특수성이 반영되는 게 당연지사일 터이다. 집단 내 권위 있는 사람의 의견이 반드시 옳다고만 할 수 없음에도 의사 결정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은가. 썩은 사과 이론이 이참에 막 떠오르는 건 나의 지나친 기우라 믿고 싶다.

 

대부분의 사람은 옳고 그름을 떠나서 내가 속한 집단이 최고라 여기지 않는가. 나부터 그러하다. 뜻이 다른 상대 집단이 있다면 하나하나 새로 살펴보고 우리 집단의 의견과 서로 조율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우리의 의견이 반드시 꼭 관철되어야 한다는 아집이 점점 커지는 세상이다. 뜻을 달리하는 다른 집단에 대해서 상당히 배타적으로 되어가는 장면을 자주 접하기도 한다. 촛불집회 집단과 태극기부대만 보아도 그렇게 느껴진다. 심지어 우리 학생들의 교우 관계에서도 이런 현상들은 심심찮게 보인다. 

 

어디 우리만 그러할까. 지구촌 전체가 다 같이 겪는 문제일 터이다.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국가 간에도 점점 더 집단 이기주의가 고조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러·우 전쟁도 결국엔 집단 내 동조화에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닐까 싶다.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라도 매사 정확한 판단과 소신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수가 옳을 수 있지만, 그러나 아닐 수도 있음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공감도 중요하지만 무조건적인 공감은 분명 아닐 터이다. 

 

어느 한쪽이 아니라 사방팔방 위아래 어디든지 바라볼 수 있는 눈, 억센 파도를 거슬러 자유 유영할 수 있는 내면의 힘, 우리 모두 길러야 할 가치들이다. 특히나 미래를 이끌어갈 우리 청소년들에게는 더더욱 소중한 정신적 자산 아닐까. 

 

작성 2023.10.13 10:07 수정 2023.10.13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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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