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명희의 인간로드] 인문주의자로서 성인이 된 ‘공자’

전명희

나는 이천오백칠십사 년 전 인간 ‘공자’다. 뛰어난 예절이 있는 노나라 산둥성 창평향 추읍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숙량흘과 어머니 안징재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본처 사이에 아홉 명의 딸이 있었지만, 아들이 없었다. 첩을 두어 아들 공피를 낳았지만 다리에 장애가 있어 대를 잇지 못할 형편이었다. 아버지는 60대 후반 늘그막에 두 번째 첩인 16세 소녀 안징재를 맞아 나를 낳았다. 아버지는 송나라 왕실의 명문 가문이었지만, 몰락해 노나라로 와서 무사가 되었고 어머니는 신분이 낮은 무녀였다. 부모님은 나를 ‘구(丘)’라고 불렸다. 어린 나는 엄격한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지만 세 살 때 나이 많은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말았다. 세 살에 인생의 시련을 맛보아야 했다. 

 

어머니의 보살핌으로 청년이 되었지만 17살 되던 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나는 어머니의 부재를 슬퍼할 겨를도 없이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천하고 거친 일이라도 기꺼이 하면서 인생을 개척해 나가며 공 씨 집안의 아들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가 19살이 되어 송나라 출신 여인과 결혼했다. 이제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으니 더욱 열심히 일해야 했다. 나는 계(季)씨 가문에 창고지기로 취직해서 가축을 기르는 일을 했다. 일만 한다면 동물과 다를 바 없기에 일하면서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예법이 뛰어난 주나라의 관제와 예법을 꾸준히 공부하여 세상 사람들로부터 점자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렇다. 학문은 나를 존재하게 하는 힘이라는 걸 나는 깨닫기 시작했다.

 

나는 창고지기를 그만두고 말단 공무원이 되어 서기 일을 시작했다. 서기 일을 하면서 틈틈이 음악도 공부하고 기예도 익혔다. 학문을 하면서 자신감을 얻었다. 학문은 세상을 구하기 위한 가장 훌륭한 도구이기에 내가 익힌 학문을 펼칠 수 있는 정치에 입문하려고 도전해 보았지만, 정치는 나와 성격이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권모술수가 횡행하고 상대의 뒤통수를 쳐야 하며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둘리는 일이 너무 어렵고 힘든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천성적으로 아첨도 못 하고 남을 비방도 못 한다. 그러하기에 정치로 세상을 개혁하는 것은 자신이 없었다.

 

세상을 개혁하는 방법은 정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학문과 사상으로 세상을 개혁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인본주의에 충실한 것이기에 나는 그동안의 공부를 통해 학문과 사상을 펼쳐 세상을 개혁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인간이 얼마나 허망한 존재인가를 일찍부터 경험했다. 예절은 땅에 떨어졌고 아버지와 아들이 전쟁터에 끌려 나가 대를 잇지 못하는 일도 허다하게 발생했다. 이런데도 전쟁은 끝나지 않고 오히려 잔인한 법가의 나라들이 판쳤다. 나는 이런 어지러운 세상을 구할 학문에 매달렸다. 그리하여 마침내 세상에 펼 학문을 완성했다. 사람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네 가지 성품으로 어질고, 의롭고, 예의 바르고, 지혜로움이 인간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나는 사람다운 사람은 어진 사람이라는 ‘인(仁)’ 사상을 세상에 내놓았다. 

 

세상은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를 몰라 어지럽고 서로 싸우면서 죽어간다. 또한 국가와 국가는 서로 빼앗고 빼앗기는 전쟁이 수시로 일어나는 데 진정한 ‘사람다움’이 없다면 결국 다 멸망하고 말 것이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의 따뜻한 마음’이 필요하다. 따뜻한 마음은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배려하고 소통하는 마음이다. 그것이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이다. 윗사람과 아래 사람 간의 신뢰가 필요하고 부모와 자녀 간에도 신뢰가 필요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신뢰를 쌓아야만 세상은 올바르게 돌아간다. 나는 이 올바름을 ‘의(義)’라고 정의했다. 공정하고 의로운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야 그 사회는 안정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반드시 ‘예(禮)’가 있어야 서로 신뢰할 수 있으며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마음의 근원인 ‘지(智)’가 있어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 

 

나는 도덕적이고 인본주의적이며 인문학적인 ‘사람다움’의 철학을 통해 세상을 개혁하려고 준비했다. 혼란한 세상을 바르게 회복하고 양심 있는 군자를 양성하여 제대로 된 인격과 인성을 교육했다. 학문은 귀족들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배울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인간이라면 누구나 꼭 배워서 사람다움을 실현하도록 교육했다. 그러다 보니 육포 한 다발을 가져와 가르침을 달라는 사람에게도 나는 마다하지 않고 다 받아 주었다. 중요한 건 배우려는 사람의 노력과 열정이다. 나는 이 열정과 노력을 높이 사서 하나라도 더 가르쳐 사람다운 사람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교육에 매진할 결과 많은 제자들이 나를 따랐다. 나에게 배운 제자들은 전국적으로 삼천여 명이 넘었다. 그중에서도 십여 명의 뛰어난 제자들이 곳곳에 진출해서 유가파를 만들어 세상을 이롭게 했다. 

 

내 학문이 높아지자 노나라 정공의 신임을 얻어 법무부장관인 대사구에 발탁되었다. 중앙 정계로 들어온 나는 노나라를 쥐고 흔드는 세 명의 권력가인 삼환(三桓)의 세력을 약화시키라는 과업을 맡았으나 이 일을 완수하지 못해 실각하고 말았다. 나는 인의예지로서 세상을 개혁해 보려는 이상이 노나라와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질고 똑똑하고 지혜로운 안회와 힘이 세고 용감한 자로와 돈이 많은 상인 출신 자공 등 많은 제자들을 이끌고 나와 뜻이 맞는 군주를 찾아 13년간 천하를 유랑했지만, 뜻이 맞는 군주를 찾지 못했다. 

 

나는 다시 노나라로 돌아와 국로(國老) 대접을 받았지만, 관직에는 나가지 않고 제자를 양성하는 일에 몰두하면서 고문헌을 정리하며 세월을 보냈다. 평생 배움에 매달렸고 그 배움을 학문으로 정립해 제자들에게 전수했다. 나의 학문과 철학은 ‘사람다움’과 그 사람다움을 실천하는 데 있다. 인의예지의 도덕적 기본 소양을 갖춰 보다 나은 인간세상을 만드는데 힘쓰며 일생을 바쳤다. 나는 세상에 태어나 인간을 연구하고 인본주의를 실현한 사람이다. 71세 되던 해 나는 세상과 작별했다. 

 

군자는 언제나 마음이 평온하고

소인은 언제나 근심에 차 있다.

 

[전명희]

서울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다 그만두고

‘밖철학연구소’를 설립해 연구에 몰두했지만

철학 없는 철학이 진정한 철학임을 깨달아

자유로운 떠돌이 여행자가 된 무소유이스트

이메일 jmh1016@yahoo.com

 

작성 2023.10.16 13:41 수정 2023.10.16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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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