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식 칼럼] 선내 화재

김태식

해 질 녘의 바다는 아름다운 석양을 배경으로 멋들어진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었다. 해는 뉘엿뉘엿 지고 구름 속으로 그 모습을 숨긴다. 파도는 잔잔하다. 육지가 가까이에 있어 바다는 마치 호수같이 조용했다. 하늘은 조각구름으로 모자이크 되어 있다.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에 있는 바위산을 보며 내가 타고 있는 배는 목적항인 스페인으로 항해하고 있었다. 

 

편안한 저녁이었다. 냉장고에서 알맞게 냉각된 '나폴레옹 꼬냑'을 기분 좋게 몇 잔 마신 덕분에 더욱 더 상큼한 기분이었다. 아내가 출국 할 때 주었던 팝송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에버그린’을 들으면서 그 날 밤은 쉽게 잠들 수 있었다. 

 

나에게 있어 유럽으로 항해하는 항로는 긴 여정이며 이처럼 평화로운 항해는 오랜만에 맛보는 여유로움이었다. 밤바다의 적막은 규칙적으로 들리는 엔진 소리와 어우러져 더욱 더 포근하고 아늑한 곳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마치 바다 위의 수면 위를 달리는 한 무리의 오리 떼처럼 나아가고 있었다. 

 

기관장의 침실에 있는 비상 전화가 급히 울렸다. 기관실로 연결된 직통전화에 이어 집무실의 전화가 긴급 상황을 알리고 있었다. 다급한 목소리였다. 

 

“기관장님! 큰일 났습니다.” 

“2등 기관사, 무슨 일인가? 침착해.” 

“기관실에 화재가......”

“뭐라고?” 

 

기관실에는 휘발유를 비롯해 곳곳에 인화물질이 즐비하다. 언제나 육지와 떨어져 있는 선박의 특성상 119를 부를 수도 없는 일. 책임자인 선장과 기관장이 119여야 하고, 소방서장이어야 한다. 모든 판단도 선장과 기관장이 해야 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급히 기관실로 내려간 기관장은  

 

“화재가 발생한 지 얼마나 되었나?” 

“네. 20분쯤 지났습니다.” 

 

새벽 1시쯤에 처음 불을 발견했던 2등기관사와 당직기관원은 보통으로 생각하고 두 사람이 진화하면 되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그들 나름대로 소화기를 운반하고 작동시켜 불길을 잡아보려 애썼지만 인화 물질을 만난 불길은 점점 화력을 더해가고 있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선내에 공급되는 전기를 차단하는 것이다. 불길과 전기가 만나면 바다 한복판에서 선원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진화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기관장은 각종 보조기관을 정지시켜 전기의 생산을 중단해야 한다. 보조기관의 작동이 없이는 주기관 또한 움직이지 못한다. 배를 추진시키는 주기관이 정지되자 배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배는 데드쉽(Dead Ship:바다 위에서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이 된 것이다. 데드쉽 상태가 지속되면 배는 추진력을 잃게 되고 복원력을 상실하여 약한 바람에도 저항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침몰할 수도 있다. 

 

만약 이 배가 폭발하고 침몰한다면 이름 모를 유럽의 어느 바다 위에서 산산이 부서진 시신으로 가족들의 통곡을 들어야 할 것이라는 두려움. 아빠를 부르는 어린 아이들의 우는 소리, 남편을 찾는 젊은 여인네의 애절한 눈물을, 내 아들을 내 놓으라는 어머니의 울부짖음은 또한 어떻게 하란 말인가. 가정형편상 원치도 않았던 승선근무라는 직업을 갖게 된 우수한 젊은 해기사의 죽음은 또한 어떻게 한단 말인가.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났더라면 원하던 대학을 가서 보다 편하게 본인의 뜻을 살려 생활했을 머리 좋은 젊은이들을 어찌 보낼 수 있단 말인가. 그 누구와도 의논 할 수 없는 이즈음에서 기관장의 판단은 결정 났다. 최종적으로 내려야 할 판단은 단 한 가지뿐 이었다. 

 

“일등 기관사. CO₂(탄산가스)상자 열쇠 가지고 와.”

“네.” 

 

전 선원들은 선내에서 가장 높고 안전한 선교로 대피시켰다. 기관실의 모든 출입문과 창문은 폐쇄되었다. 스위치의 작동만이 기관장의 손에 달려 있었다. 이걸 터뜨리면 불은 진압이 되겠지만 급격한 온도 하강으로 인하여 각종 기기에 나쁜 영향을 미쳐 다시 가동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 두려웠다. 화재는 진압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배는 추진력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성을 갖고 있었다. 이 판단은 목숨과 바꾸기 일보직전에 해야 하는 중대한 행동이다. 하지만 폭발보다는 나은 선택을 해야만 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일을 한다는 것은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 불확실성은 실패의 확률이 높아지는 것을 말해 주기도 한다. 기관장의 손이 비상장치의 레버를 잡는 순간 가볍게 떨리기 시작했다. 줄을 당겼다.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고요해 졌다. 화재가 발생하기 이전의 평화로운 적막이 찾아왔다. 한참이 지나고 문을 열고 기관실에 들어서니 기관실은 폭설이 내린 듯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하얀 보자기를 덮어 놓은 듯이 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화재는 진압되었다. 각종기기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 우려했던 무동력상태로 되면 어쩌나하는 생각에 머릿속 또한 하얗게 채색되고 있었다. 그러나 온통 무채색의 바닥에서 하늘은 전 선원의 편이 되어 주었다. 하나하나 점검한 기기들이 정상으로 작동되기 시작했다.

 

[김태식]

한국해양대학교 대학원

선박기관시스템 공학과 졸업(공학석사)

미국해운회사 일본지사장(전)

울산신문 신춘문예(등대문학상) 단편소설 당선 등단

사실문학 시 당선 등단

제4회 코스미안상 수상

이메일 :wavekts@hanmail.net

작성 2023.10.17 21:32 수정 2023.10.17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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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