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개 걷히면 바다가 길을 열어 아침을 만든다. 청사포는 왼쪽이고 미포는 중앙이 되고 오른쪽은 해운대가 되는 언덕에 선다. 4월이면 벚꽃 피어 바빠지는 달맞이 길에 올라서면 바다는 침묵시위를 한다.
해운대가 부르는 봄의 노래는 초록빛 움을 틔우는 트로트다. 어렵지 않은 곡조에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음률에 따라 수월하게 부르면 되는 노래반주를 한다. 다가오는 소리는 왈츠 곡처럼 경쾌하지만 천천히 오고 빨리 간다.
여름이면 해운대에도 하늘색 바람이 분다. 바람이 차분해지는 날이면 파도가 얕아지고 바다는 언제나 그리운 곳이 된다.
미포는 횟감들이 즐비한 곳이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광어와 우럭을 섞어 한 접시에 싸게 판다고 소리치니 수족관의 물고기들이 춤을 춘다. 낮달이 사나운 햇살을 가리고 여름날의 따가움이 햇볕을 핥는다.
노루 꼬리만 한 석양이 지면 해운대의 여름은 새로운 막을 올린다. 막 뒤로 감춰져 있던 공연이 시작된다. 저녁을 낮으로 바꾸는 마술이 관객들을 모으지만 해운대는 밤과 타협하지 않고 연령대별 음악공연을 펼친다. 바다로 향하는 악기연주가 있는가 하면 낭만적인 기타 소리, 젊은이들의 함성이 있다.
낮달에 가려져 있던 불빛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낼 때쯤 밤이 부르는 노래가 시작된다. 한여름의 모래 위의 수 많은 발자국이 누구의 것인지 표시해 놓지 않아도 좋고 무심하게 밟고 가도 좋다. 파도는 모래알 건반을 두드리며 왔다 갔다 반복한다.
석양이 달빛 마중을 나가니 이제 막 문을 연 하늘이 달빛을 품고 늦은 밤으로 간다. 농익은 저녁 여름이 달빛 어린 해수욕장을 어루만지고 있다. 물이 오르고 포구를 떠난 바람이 파도를 깨우지만 바람은 여름 파도에 닿아도 젖지 않는다.
어디엔들 낙엽 지는 가을이 없으랴. 벚나무 잎이 붉어지는 것은 자신의 가을을 더욱 재촉하여 뿜어낸 색깔이다. 해운대의 가을바람은 갈색으로 불어 온다. 한여름 시름 이겨낸 낙엽은 여름의 유산이고 가을이 전해준 단풍은 새악시되어 부끄러운 붉음을 건넨다. 푸른 모래 포구靑沙浦에 전어잡이 배 만선의 깃발 올리고 수평선을 실어 나른 뱃길은 물이랑이 승천한 안개도 한 움큼 풀어 놓는다.
'이제 가을이 왔구나.' 하고 어루만져 주고 싶은 날이다. 가을이라는 계절은 언제나 그랬듯이 아쉬움을 가진 계절이다. 흐트러져 있던 모든 것들을 제자리로 돌려보내야 하고 알맹이를 챙기고 정리 정돈을 해야 한다. 한여름 동안 내리쬐던 뙤약볕을 묵묵히 받아들였다는 흔적들을 하나둘씩 거두어들이게 한다.
해운대는 방문자들에게 언제나 화려한 가을 외출을 안내한다. 낮달을 따라 해안가로 걸어가노라면 가을을 뿜어내는 향이 발길과 어우러져 콧노래를 부르게 한다. 달맞이 길은 가을의 모델이 되고 가을은 붓을 들어 풍경화를 그려낸다. 해운대는 달맞이 길을 자산으로 삼아 산책하는 사람들에게 경치의 아름다움을 무상 대출해 준다. 그래도 해안선의 아름다움은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해운대의 가을은 더욱 가을이다.
해운대의 색깔이 온통 하얘지는 때가 간혹 있다. 해운대가 하얀 띠를 두르면 가을의 붉은 단풍도 갈색 낙엽도 해월정의 푸른 소나무도 색깔 선택의 자유를 모두 잃어버린다. 오직 하얀 색깔 단색뿐이다. 달맞이 길을 거니는 사람들의 정이 하얀 세상 속으로 파고든다.
‘첫’자가 붙어 마음 설레지 않는 낱말이 없다. ‘첫출근’ ‘첫만남’ ‘첫사랑’ ‘첫입맞춤’ ‘첫차’ 등…. 그중에 으뜸은 ‘첫눈’이다.
어느 해 겨울 해운대에 첫눈이 내렸다. 해운대가 첫눈을 품게 해주어 한층 더 마음을 설레게 했다. 겨울 속에서 뛰쳐나온 하얀색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런 눈 덮인 전경을 모두 볼 수 있는 달맞이 고갯길 따라 걸어가며 청사포를 내려다보니 그곳도 모두 하얀색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김태식]
한국해양대학교 대학원
선박기관시스템 공학과 졸업(공학석사)
미국해운회사 일본지사장(전)
울산신문 신춘문예(등대문학상) 단편소설 당선 등단
사실문학 시 당선 등단
제4회 코스미안상 수상
이메일 :wavekt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