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이천사백팔십여 년 전 인간 ‘데모크리토스’다. 그리스 북동부 끝자락에 있는 아름다운 트라케 연안의 압데라에서 태어났다. 압데라의 기름진 땅과 온화한 날씨는 순하고 착한 사람들이 살기에 알맞은 곳이다. 잔잔하고 평화롭게 일렁이는 연안의 바다는 저 너머의 세상과 우주에 대한 궁금증을 품게 하기에 알맞아 예로부터 철학자들이 많이 나온 곳이다. 나는 자라나면서 자연스럽게 철학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지고 세상에 대한 궁금함이 많은 아이로 자라났다. 나는 큰 부자인 부모님 덕에 근심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었다. 공부와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돈 걱정 없는 환경을 만들어 준 부모님 덕분이기도 했지만, 앎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 강해 한 번 생각 속으로 빠져들면 그 생각의 근원까지 가봐야 직성이 풀리는 타고난 성격 때문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물려준 재산 중 일부를 떼어 작은 서재를 하나 만들었다. 그 서재에서 종일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사색에 몰두했다. 공부는 내 삶의 전부였을 정도로 그 즐거움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문학과 천문학은 물론 수학과 물리학 그리고 의학이나 농학, 지리학과 사학 또 윤리학까지 세상 이치를 깨닫기 위해 광범위한 공부를 했다. 나는 공부에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공부한 것을 가지고 체계적으로 글을 쓰며 집필 활동을 했다. 내 작은 서재가 책과 글 쓴 결과물로 터져나갈 정도였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박학자라고 부러워했지만 나는 세상 사람들의 평가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여행을 좋아했다. 부모님이 물려준 재산 대부분을 이집트, 페르시아, 인도 등을 여행하는 데 썼다. 기하학을 배우기 위해 이집트에 가서 유능한 선생님을 만났고 페르시아에 가서는 점성술에 능한 선생님들을 만나 세상에 관해 배움을 얻었다. 그뿐만 아니라 동방의 여러 나라를 여행했고 특히 현자들의 나라인 인도에 가서 현자들을 만나 정신세계에 대한 것들을 폭넓게 교류했다. 세상을 두루 유랑하다 보니 부모님이 물려준 재산의 대부분을 탕진하고 말았다.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올 무렵에는 돈 한 푼 없어서 남동생 다마소스에게 손을 벌려야 했다. 다행히 동생은 내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와 공부에 매진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생계를 지원해 주었다.
고향에 돌아와 나는 부모님의 재산을 모두 탕진했다는 이유로 재판정에 불려 나갔다. 재판장은 부모님이 물려준 재산을 탕진한 것은 큰 죄이므로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판결했다. 나는 변론을 통해 내가 여행에 겪은 일들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했다. 세상을 배운다는 건 집에 앉아서 그냥 배워지는 것이 아니라 안목을 넓히고 세상 사람들과 만나면서 그들이 사는 방식과 그들의 생각과 사상을 알아야 비로소 나의 사유도 넓어지는 것이라고 강변했다. 여행에서 보고 듣고 깨달은 것 하나하나까지 사소하게 낱낱이 진술했다.
“당신은 유산을 탕진한 게 아니라 마르지 않는 지식으로 바꾸었다.”
재판장은 이렇게 나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나는 이제 자유롭게 철학과 사상을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즐거움은 인생의 동의어다. 인생은 즐겁기 위해 존재한다. 인생의 최고 목적은 쾌활함에 있으며 모든 일은 온건함과 문화적 소양이 성립되어야 한다. 그래야 철학도 사상도 문학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삶에 있어서 유쾌와 불쾌는 이로운 것들과 이롭지 못한 것들을 구별하는 경계다. 그러하기에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최선은 가능한 한 유쾌하게 그리고 괴롭지 않게 삶을 이끌어 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육체보다 영혼을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라야 한다. 왜냐하면 영혼의 완전함은 육체의 결함을 바로 잡지만 육체의 강함은 신중하지 못하면 영혼을 더 가치 있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의 이런 철학적 견해를 두고 사람들은 나를 ‘웃는 철학자’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나는 세상의 근원인 원자에 관해 쉼 없이 연구했다. 세상은 완전하게 채워진 원자와 아무것도 없는 허공으로 나뉜다. 원자는 너무 작아서 수적으로 무한하다. 이 원자들이 허공 속에서 서로 충돌하고 부딪힘으로써 끊임없이 움직인다. 어떤 것들은 아무 데나 튀어 나가고 또 어떤 것들은 형태나 크기, 위치, 배열의 일치에 따라 서로 얽히고 하나로 뭉쳐 결합체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어떤 필연이 그것들을 마구 흔들어서 따로따로 흩트려 놓을 때 그 결합체는 소멸한다. 이러한 원자는 어떠한 성질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런데도 만물에 수많은 다양성이 생기는 것은 결합할 때 형태나 배열 위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세상은 원자와 빈 공간뿐, 나머지는 의견이다.”
나는 유쾌하게 철학을 하며 세상을 달관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하다 보니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새롭게 트였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안고 사는 사람들에게 나는 지혜로운 예언을 해주었다. 나의 예언은 소문을 타고 멀리까지 퍼져 나갔다. 내가 저술한 ‘대우주 체계’를 사람들에게 낭독해주며 철학적 사고를 키워주었다. 그 덕분에 예언자로서 명성도 얻고 아주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나의 명성은 더욱 공고해져 가고 사람들은 나를 위해 청동으로 동상을 만들어 세우기까지 했다.
웃는 철학자인 나는 공부하는 즐거움으로 평생을 큰 풍파 없이 살았다. 나는 나이도 너무 많이 먹고 이제 곧 죽을 때가 되었다는 걸 직감했다. 그런데 나의 누이가 테스모포로스축제 기간에 내가 죽을까 봐 걱정이 태산이었다. 나는 누이의 그런 애처로운 모습을 보고 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따뜻한 빵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따뜻한 빵을 코에다 대고 축제 기간 동안 안간힘을 다해 살았다. 비로소 3일간의 축제가 끝나고 나서 아무런 고통 없이 세상을 마감했다. 내 나이 109세였다.
[전명희]
서울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다 그만두고
‘밖철학연구소’를 설립해 연구에 몰두했지만
철학 없는 철학이 진정한 철학임을 깨달아
자유로운 떠돌이 여행자가 된 무소유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