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석 칼럼] 시간 밖의 시간으로

허석

승용차를 주차하고 아파트 출입구로 다가갔다. 두꺼운 유리문 너머 한 아이가 계단을 내려와 신나게 뛰어온다. 현관 자동유리문 앞에서 멈칫하는가 싶더니 “쿵”하고 이마를 찧고는 뒤로 벌렁 넘어져 서럽게도 운다. 유리문을 못 본 것이 아니라 자동으로 열리는 문의 시간보다 자기의 시간이 더 빨랐기 때문이다. 이마가 아픈 것보다 시간이 너무 늦게 가는 것이 더 답답한 모양이다. 어린아이들은 사람의 시간이 아니라 자연의 시간을 갖고 산다.

 

한여름에는 요즘도 DDT 방역차가 골목을 다닌다. 방역차 뽀얀 연기 속을 두 팔 휘저으며 ‘신나게 달리던 아이’였던 낯익은 추억이 떠오른다. 하지만 시간의 꼼수를 알아버린 늙은 아이들은 이제 뛰지 않는다. 시간이 동무하며 걷던 꿈 많은 청춘도 한때일 뿐, 신발 끈 고쳐 맬 틈도 없이 평생 앞서만 가는 시간을 뒤쫓으며 살아야 했다.

 

누구나 자기의 시간을 갖고 산다. 어른은 어른의 시간이 있고 아이는 아이의 시간이 있다. 과거는 과거대로, 현재는 현재대로 어제와 오늘의 시간이 존재한다. 도시와 시골의 시간이 다르고 너와 나에게 주어진 직업에 대한 시간이 다르다. 성격이 급한 사람은 놀아도 항상 바쁘고, 세상일에 별 욕심이 없는 사람은 그만큼 느긋한 시간을 갖고 산다. 

 

같은 시간이라도 상황에 따라, 마음가짐에 따라 고무줄처럼 늘어나고 짧아진다. 도시에서 한 정거장 가는 시간이면 시골에서는 축지법처럼 몇 개의 봉우리를 넘어 다른 마을에 도착한다. 겨울이 지나가기도 전에 봄옷부터 꺼내놓는 아내지만 아들 녀석은 초여름이 되도록 겨울옷을 고집했다. 하기 싫은 일은 1분이 1시간처럼 지루하지만 좋아하는 일은 1시간이 1분처럼 짧기만 하다.

 

자연의 시간은 언제나 흐르고 있지만 우리는 시계와 달력을 통해 인간의 시간으로 만들어 살아간다. 태양력이니 태음력이니 달과 날짜로 쪼개고 초 단위의 오차까지도 계산해서 한 치의 틈도 주지 않는다. 세상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도 시간뿐이다. 어디에나 있으나 어디서도 보이지 않는다. 되돌릴 수도, 늦출 수도, 멈추지도 않고 멈추게 할 수도 없다.

 

속도로 대변되는 현대사회는 누구에게나 ‘시간이 없다.’라는 것이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경쟁 사회는 촌각의 해찰도 용서하지 않고 서로 쫓고 쫓기는 세상을 만들었다. 속도가 목적이 되어버린 세상을 당연한 것처럼 누구 하나 의심하거나 거부하려는 사람이 없다. 바쁘게 살면 마치 시간을 아껴 저축이라도 해두는 것처럼 남들이 가니까 끝까지 가보자며 ‘오늘’을 허둥대며 살아가고 있다.

 

바쁘다는 핑계로 꽃이나 나무, 가족이나 친구들을 돌아보는 것은 계속 ‘내일’로 미룬 채 살았다. 의식하지 않아도 시간은 덜 잠가놓은 수돗물처럼 “뚝뚝” 소리를 내며 흘러갔다. 그러는 사이 아이는 자라 혼자서 청년이 되어버렸고, 꽃잎처럼 화사했던 아내의 얼굴도 주름살이 생겼다. 몸은 시간이 흐르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내가 없는 시간은 아무런 추억도,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태양을 향해 달려가는 이카로스처럼 세상을 다 소유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젊은 시절이었다. 남보다 앞서가야 하고, 어떻게든 이겨야 하고, 무엇이든 뺏어와야만 하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던 날들이었다. 부와 권력, 명예나 명성 등에 대한 집착은 또 집착을 낳고 욕심은 또 욕심을 부추기며 살았던 지난날이었다. 무엇이 행복한 일인 줄도 모른 채 열심히만 살면 잘사는 것인 줄만 알았던 건조한 시간이었다.

 

이제, 세상의 바깥으로 나와 시간 밖의 시간으로 산다.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거나, 더 성공해야겠다는 피상적 목적의식도 없어지고 사람들 많은 곳에서 어울려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 같은 의존적이고 번잡한 관념도 없어졌다. 이것과 저것, 옳고 그름, 어둠과 밝음을 구분해내느라 괜한 감정에 사로잡혀 괴로워했던 저편의 시간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시간 밖의 시간은 치열한 삶에서 벗어나 은퇴의 나이가 된 시점일 수도 있고, 세상 안과 밖의 경계일 수도 있고, 행복한 삶에 대한 인식의 차이일 수도 있고, 현재의 나 자신의 모습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것을 반성하고, 그동안 무사히 살아온 것에 대해 감사하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나를 위해 사는 시간임은 분명하다. 남이 아니라 나를 위한 시간, 겉이 아니라 속을 들여다보는 시간, 속도가 아니라 방향에 중심을 둔 시간이다.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시간의 주인이 되어 나 자신에 집중하며 사는 삶이다. 마음의 여유를 갖고 모든 일을 쉽고 간단하고, 그리고 천천히 산다.

 

시골에서 혼자만의 삶도 나름대로 편하고 좋다. 지족지부(知足知富)인 듯 물건이든, 사람 관계이든 꼭 필요한 만큼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살맛이 없거나, 술에 의지하거나, 고독하거나 외로움에 몸부림치지도 않는다. 남에게 사랑받고 미움받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거나 뭘 맞춰준다는 생각도 하지 않으니 마음이 홀가분하다. 순전(純全)한 삶, 혹시 그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강력한 무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강해지려고 한다. 강하다는 것은 이를 악물고 세상을 이겨낸다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내 것으로 살고자 하는 의지이다. 남과 비교하지도 말고 비교당하고 싶지도 않다.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어느 것에도 함부로 뿌리내리지 않고, 무엇에도 나 자신을 포기하지 않겠다. 옳고 그름의 지혜보다 좋고 나쁨의 감정으로 단순해지려 한다. 자유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을 명제로 삼는다.

 

자연 속에 산다는 것은 선악도, 시비도, 호오도 따지지 않는 일이다. 높고 낮음, 잘나고 못남, 있고 없고의 구별과 차이를 떠난 삶이다. 자연은 존재할 뿐이지 누구에게도 간섭하지 않는다. 부러워하거나 시샘, 질투할 일도 없다. 그렇다고 누구의 명령을 받들거나 어떤 의무에 구속당하지도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하며 살다 보면 저절로 삶이 자유롭고 편안해질 수밖에 없다. 

 

하루의 계획도, 목적도 세우지 않는다. 순간순간 일어나는 일들을 마음으로 느끼고 ‘할까?’ 하는 순간의 의지로 움직인다. 배고프면 밥 먹고, 더러우면 마당 쓸고, 바람이 그리우면 들길을 걷는다. 책 읽고, 차 마시고, 하늘 쳐다보고, 새소리 듣고, 무엇보다 아무도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만족스럽다. 게으름을 피워도 뒤처지는 일이 없고, 땀을 적셔도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시계를 보지 않아도 자연의 일과를 맞출 수 있고, 서두르지 않아도 해야 할 일은 다 하고 산다.

 

나이는 기억하지 않으려 한다. 얼마나 살고 죽느냐는 직선적인 시간일 뿐이다. 얼마나 자유롭게, 얼마나 자기 삶에 몰입한 삶을 살았는지, 얼마나 생의 포만감을 누리고 사는지에 오래 살고 덜 살고자 달렸을 뿐이다. 그렇게 살려고 마음먹은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내려놓으니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다. 

 

시간은 현재에만 존재한다. 영혼의 세계에는 시간이 없다. 시간이 없는 삶은 무의미하다. 모든 생명은 잉태되면서부터 시간의 마술에 걸려든다. 좋은 시절은 짧고, 아픔과 고통의 시간은 긴 것이 인생이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느냐의 문제였다. 행복의 지름길이 따로 없는 것 같다. 바쁜 시간보다 풍요로운 시간을 진작 만들었어야 했다.

 

 

[허석]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저서 : [꿈틀, 삶이 지나간다]

[그 남편, 그 아내]

[시간 밖의 시간으로]

[삶, 그 의미 속으로]

천강문학상 수상

등대문학상 수상

흑구문학상 수상

선수필문학상 수상

원종린수필문학상 수상

이메일 :sukhur99@naver.com

 

작성 2023.11.14 09:59 수정 2023.11.14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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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