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영의 낭만詩객] 세월이 가면

이순영

늦가을이면 잊혀진 사랑이 떠오른다. 유행가 가사 같은 사랑 이야기는 언제나 낙엽 지는 늦가을에 떠오르며 사람들의 폐부에 달라붙는다. 당장 살기도 힘든데 얼어 죽을 사랑은 무슨 사랑이냐고 혀를 끌끌 차는 사람일수록 저 가슴 깊은 곳에 푹 묻어둔 사랑이 있는 법이다. 견디기 힘든 고독 뒤에는 사랑이 있다. 그래서 사랑은 통렬한 자기 반성이다. 그러다가 다시 생각해보면 사랑은 개나 줘도 먹지 않는 싸구려 감정의 배설물일지 모른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 배설물은 시간이 지나면 정화되어 물이 되고 물은 다시 공기가 되고 공기는 생명이 되니 사랑이라는 관념은 인간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랑은 누군가에겐 위험 없는 세계의 안락함이거나 또 누군가에게는 독거미가 득실거리는 폐가다. 박인환의 시처럼 나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다. 다 잊었다. 그래도 그의 눈동자와 입술은 내 가슴에 남아 있다. 사랑은 갔지만 과거는 남아 기억의 창고에 쓸쓸하게 누워있다. 나는 종로3가에서 송해길을 지나 사거리 모퉁이를 돌아갈 때마다 박인환이 경영했다는 마리서사(茉莉書肆)라는 서점을 기억해 내고 그 건물 앞에서 서성이는 버릇이 있다. 지금은 상전벽해가 되었지만, 그 건물은 아직도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 그 옛날 박인환의 추억을 기억하는 것 같았다. 사람은 가도 옛날은 남는 법이라는데 종로3가 모퉁이에서 나는 박인환을 생각하며 가끔 길을 잃곤 한다. 

 

1940년대 후반에 박인환이 경영했던 그 건물은 칠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쓸쓸하게 시간 위에 앉아 있다. 어느 때는 천 원짜리 잡화를 파는 상점이 되었다가 또 어느 때는 핸드폰 판매점이 되었다가 또 어느 때는 이월상품을 파는 옷가게가 되었다가 하며 세월의 붙임을 다 받아내고 있었다. 변하고 또 변하는 종로 한복판에서 늦가을 나는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을 읊조리며 박인환을 기억해 내는 일로 가을을 보내곤 했다. 잘생기고 품위 있는 그는 종로 거리에서 문우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잃어버린 조국의 비애에 울분을 토하기도 하고 또 문학 이야기로 위로받으며 우울한 청춘을 보냈을 것이다.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박인환의 이 잔잔하고 애잔하고 서글픈 사랑 이야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는 사랑을 하지 못했거나 사랑을 모르거나 아니면 사랑은 끔찍한 속임수라고 믿는 사람일 것이다. 양복이 잘 어울리는 모던보이, 잘생긴 외모에 유난히 큰 키는 어지러운 시대에 사랑이라는 키워드로 살아가기에는 조금 거슬렸지만, 그는 가족은 물론 인연이 있는 사람들을 지극하게 사랑했다. 그의 시를 보면 진실하고 열정적이며 애잔한 사랑의 마음을 잔잔하게 드러내고 있다. 누구나 ‘목마와 숙녀’를 읽으며 청춘을 보내고 ‘세월이 가면’을 읽으며 인생을 보낸다. 다 그렇게 그의 시 몇 줄을 읊조리며 인생이라는 바다를 건넌다.

 

‘세월이 가면’은 박인환의 마지막 시다. 그 시절 최불암 어머니가 명동에서 운영했던 예술인들의 아지트 ‘은성’에서 반백수들인 예술인들이 자주 모였는데 어느 날 극작가 이진섭과 가수 나애심과 시인 박인환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박인환이 종이 쪼가리에 끄적거리며 시를 써서 극작가인 이진섭에게 보여주자 즉석에서 곡을 붙이고 옆에 있던 나애심이 바로 노래를 불렀다. 나애심이 먼저 일어나 나가고 나중에 온 테너 임만섭이 그 악보를 보고 다시 노래를 부르자 주위에 있던 손님들이 몰려들어 노래를 감상했다. 시의 탄생은 이렇게 즉흥적이고 예술적이었다. 반백수들의 합창으로 야단법석했을 ‘은성’의 모습이 그려진다.

 

나는 강원도 여행을 가면 꼭 인제에 들려 박인환을 만난다. 박인환문학관은 그냥 버릇처럼 들르는 곳이다. 박인환은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에서 1926년에 태어나 1956년에 종로구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의 나이 겨우 29세였다. 지금 같으면 사회 초년생에 불과한 나이지만 그 시절의 스물아홉은 매우 성숙하고 인생을 달관한 나이였을 것이다. 시대가 사람들을 일찍 철들게 했고 시절이 인생을 빨리 알게 했을 것이다. 조니 워커 위스키와 카멜 담배를 좋았던 박인환이 그가 죽자 동료 문인들은 장례식에 조니 워커 위스키와 카멜 담배를 올려놓았다고 한다. 그는 지금도 우리에게 나직이 말하고 있는 듯하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이순영]

수필가

칼럼니스트

이메일eee0411@yahoo.com

 

작성 2023.11.16 10:51 수정 2023.11.16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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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