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필의 역사기행] “삼봉의 결의”

성능의 北漢誌

김용필

나는 다시 또 북한산을 오른다. 100번은 될 것이다. 북한산성에 묻힌 신비로운 이야길 발굴하여 세상에 내놓기 위한 걸음이었다.

 

삼각산은 난공불락의 요새

 

삼각산 중흥사는 백제의 첫 도읍지였다. 고구려 소서노 왕비가 두 왕자를 데리고 남하하여 나라를 세우려고 첫 자릴 잡은 땅이었다. 온조는 BC 18년, 고구려 수도 오녀산성과 같은 지세와 기운을 가진 삼각산 아래에 첫 도읍지를 정하고 2대 다루왕때 한산 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제4대 개루왕 132년에 북한산성을 쌓고 제2수도로 활용하였다. 

 

백제 23대 개로왕은 고구려 장수왕의 침략을 받고 삼각산 전투에서 처참한 죽임을 당하고 웅진으로 수도를 옮기는 등 백제가 위기를 맞았다. 장수왕은 삼각산 지세가 너무 수려하여 이곳을 남평양이라고 명하였다. 신라 진흥왕은 한수 사령부를 세웠다. 고려 때 최영은 공민왕의 명을 받고 삼각산에 비밀 군영을 설치하고 이성계에게 요동 정벌군을 훈련 시켰다. 

 

최영은 이성계와 자주 삼각산 백운대에 올라 요동 정벌의 욕망을 펼쳤다. 마침 이곳 보우가 중흥사에서 그들을 도우며 불교개혁을 단행하였다. 중흥사에서 이성계와 보우 그리고 무학대사 모여 차를 마시면서 국정을 논하곤 하였다. 병자호란 후 효종은 삼각산에 북벌군단을 세우고 네덜란드인 박연을 포승 장으로 5만 대군을 훈련 시켰던 곳이다. 북한산성은 우리 역사의 곡절을 간직한 산이다. 

 

일개 축성 기술 스님이 팔도 도총섭이 되었다

 

북한산성 중흥사에서 팔도도총섭 성능대사(聖能大師)는 8도 승병과 승려를 통솔하여 북한산성을 쌓고 30년 동안 성을 지키면서 자신의 업적을 북한지에 적어 밝혔다. 그는 험준한 11km의 기암 산에 석축 성을 6개월 만에 쌓았다는 것은 인간이 이룰 수 없는 신의 한 수라고 자찬하면서 기적적인 북한산성 축성 내용을 설명한 지도와 북한지(北漢誌)를 집필하였다. 난 그가 북한지를 만들었던 중흥사와 태고사 주변을 더듬으며 목판 인쇄소를 찾아다녔다. 그는 태고사와 봉성암에 목판 인쇄소를 두고 산성지리도와 북한지리서를 발간하였다.

 

북한산성 축성은 숙종 대왕의 숙원이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군을 맞아 피해 갈 행궁이 없어서 임금이 나라 잃은 수치를 가슴에 담고 조부 효종이 북벌군을 양성하던 곳에 행궁을 지을 생각을 하였다. 조부 효종은 북한산에서 북벌군을 훈련하였다. 영의정 김집과 송시열은 왕의 뜻을 받들어 북벌을 추진하였으나 사후 북벌 반대론자들에 의하여 북벌군은 해체되었다. 차후 숙종은 북한산을 둘러보고 와서 영의정 이유에게 명하였다.

 

“북한산성을 쌓고 도성이 위급 시에 피난할 행궁을 지으시오.”

“네, 전하, 이미 계획을 수립해 놓았습니다.” 영의정 이유가 답변하였다. 

“빨리 추진하시오.”

 

숙종은 병자호란 때 수모를 당한 인조임금의 한과 조부의 숙원을 기려 산성과 행군을 축성하기로 하였다. 영의정 이유는 축성 책임 비변사를 소집하고 총융사를 발족하여 어영청. 금위영, 훈련도감, 경리청을 북한산에 짓고 총책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축성은 축성기술자 성능이 맡았고 후원은 총융사에서 지원하였다.  

 

숙종은 축성 건축기술자인 화엄사 각성 스님에게 축성을 의뢰하였다. 각성은 제자인 축성기술자 성능을 추천하였다. 일개 수행승이었던 성능이 축성기술자로 인정받은 것은 화엄사 각황전 건축과 여수 흥국사 중수 사적비(1703년)을 중건하면서 실력이 인정되었다. 당시 영의정 최석정이 그를 적극적으로 추천하였다. 마침내 성능은 북한산성 축성 감독관으로 추대되었다. 그에게 주어진 막중한 직위는 전국의 승려와 승병을 통솔하는 필도도총섭이었다. 그는 중흥사에 본부를 두고 총융사의 지원을 받아 축성을 시작하였다.

 

총융사와 팔도도총섭의 알력

 

북한산성 축성은 도총섭 승병이 맡았고 운영과 지원은 총융사가 맡았다. 그러나 주도권을 놓고 갈등이 심했다. 총융사는 총융대장 1명, 천총 2명 파총 4명 초관 26명 관군 501명으로 구성되어 축성을 관리하였는데 축성 총책은 성능 도총섭장이 맡은 것에 불만이 많았다. 선능은 승영사찰에 승병 340명을 주둔시키고 총융사 관군 1,000여 명과 삼도에서 동원된 부역병 10만 명을 데리고 작업을 시작하였다. 산성은 13문 2암문을 축성할 계획을 세우고 승려들이 묵을 11사찰과 2암자를 지었다. 1711년 축성은 도합 12만 명이 동원되어 6개월 만에 끝냈다. 건축 토목사에 있을 수 없는 단시간의 성과였다. 행궁 역시 1773년에 마쳤다. 

 

8도 도통섭 성능은 산성과 행궁을 짓고 승병군을 주둔시켜 산성과 행궁을 지켰다. 

중흥사는 북한산성 관리 본산이 되었다. 그리고 노적봉 아래 진국사에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승군을 양성하였다. 

 

그는 당대 최고의 토목 축성기술자인 각성의 제자였다. 각성은 남한산성과 평양성을 지은 기술자였다. 각성과 처능, 성능은 당대 조선 건축의 거인이었다. 신라의 김대성. 백제의 아비지 만큼의 위대한 건축기술자였다. 성능대사는 30년 동안 산성을 지키면서 태고사에서 북한지를 만들었다. 참 대단한 능력과 처세를 가졌던 인물이었다. 억불숭유 정책의 나라, 조선에서 천대받던 불승들의 지위를 높인 분이었다. 승병은 나라가 위급할 때 항마군, 의용승병으로 징집되어 피 터지는 전장에서 무기 없이 온몸으로 물자 보급과 토목 병기 제작을 하였다.

 

의승병이란 말은 도색 된 명칭이었다. 마치 조정은 승려를 노비처럼 부려 먹었다. 승병의 대우와 지위는 처참했다. 선조는 임란이 터지자 전국 사찰에서 승병을 징집하려고 각도에 2명의 도총섭을 두었고 8도도총섭이 이들 승병을 관리하였다. 초대 팔대도총섭은 휴정이고 2대가 유정. 3대가 각성, 4대가 성능, 5대가 처능이었다. 그리고 각도의 도총섭은 역대 120명이 나왔다. 

 

말이 의승병이지 중이었던 그들이 무기 없이 전장에 투입되어 무슨 일을 했을까, 창 칼받이였다. 승군들은 천박한 궁궐 조창, 산성 축성, 수 비관 측, 서고 지기 토목공사. 보급병. 물자 조달 병기 운반, 사병보조, 노꾼 일을 하였다. 전장에선 주로 축성과 토목 건축일을 맡았다. 북한산성이 축성되면서 승려의 지위가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억불숭유정책으로 역시 스님은 천민이었다. 그나마 승군에 가담한 승려는 대우를 받았기에 승려들은 의승병이 되려고 하였다.

 

북한지에 기록된 북한산성

 

불후의 명작이 출현하다. 성능대사는 1711년 축성을 마치고 태고사와 봉정암에 불경과 북한지를 인쇄할 목판소와 인쇄소를 설치하고 북한지 집필과 발행 목판인쇄작업에 몰두하였다. 마침내 영조 21년(1745년) 완성하여 북한도(지도)3부와 북한지 지리서 1권을 출간하였다. 

 

북한지에 기록한 내용은 북한산 지세, 도리, 연혁, 산계, 관원, 궁전, 윤각, 사찰 위치, 도로, 창고. 도루, 장대, 우물을 자상하게 표시하고 설명하였다. 그 공적은 봉성암에 성능영세불망비(선정비)에 남겼다. 도성 축성을 위해 사찰을 짓고 중흥사를 8도도총섭 승병 본영으로 삼고 진국사엔 승병 본부를 두고 360 승병과 1,000명의 총융청 훈련도감 병사가 주둔하였다. 산성에 승병사찰로 11사찰 2암자를 세웠다. 국영사. 노적사. 보광사. 보국사. 봉성암 부왕사. 원각사. 원효암. 상운사. 서암사. 중흥사. 태고사. 원각사인데 모든 사찰은 131칸 이상의 방을 만들어 승병과 총융청 병사와 축성 인부의 기숙사로 활용하였다. 

 

축성 부역자는 대남문에서 의상봉. 대서문에 이르는 성은 전라도 도총섭이 맡았고 대남문에서 대성문 위문까진 경상도 도총섭이 맡았고 위문에서 원효암 대서문 구간은 충청도 도총섭이 맡았다. 축성은 6개월 만에 완성하였다. 쉽게 완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의승병과 삼도 도총섭의 활약이 컸지만 원래 백제째 만든 성을 중축하는 일이었다. 

 

중흥사지 태고사는 불교개혁의 본거지

 

중흥사지를 걸으면서 보우 왕사의 슬픈 고뇌를 회상한다. 북한산성 내 태고사는 고려 숙종, 1103년에 건립한 사찰이다. 여말 원증국사 보우(1301-1383)가 수도하였다. 공민왕의 왕사였던 보우는 신돈과 권력다툼에서 물러난 후 중흥사 주지로 은거하면서 1341년 태고사를 짓고 원로 왕사로 활약하였다. 원래 중흥사는 고려가 몽고 침략을 받았을 때 항몽 투쟁을 하던 삼별초가 군영을 설치했던 호국사찰이었다. 

 

그 후 이 절의 주인공은 요정정벌을 기획한 공민왕과 최영 장군이 은밀하게 숨겨놓은 군영이었다. 공민왕은 최영 장군에게 강한 군대를 양성하라고 명하였다. 최영은 중흥사에서 원증국사 보우와 부국강병을 논하곤 하였다. 보우는 태고 암을 짓고 호국불교의 이념을 교도하였다. 노승은 요승 신돈의 지배로 혼란스런 불단(교종.선종)의 패권 다툼을 한 종파로 통일하려는 개혁을 시도하였다. 

 

태고종단이었던 대사는 조계종단을 아우르는 동안에 통합이란 이념에 고뇌하였다. 결국은 두 종단을 아우르는 개혁은 태고종과 조계종단의 합병이었다. 태고사는 어언 통합 사찰로 변하는 위험을 고수하였다. 다시 말하면 태조종의 사찰이 조계종의 사찰로 변했다.  

  

여말 공민왕 왕사로 원나라를 오가면서 국사를 살폈던 보우는 태고종의 명승으로 전국 태고종 사찰과 승려를 대표하는 스님이었다. 공민왕이 요승 신돈을 기용하면서 보우는 공민왕과 자주 다투었다.

 

“전하, 신돈 같은 요승이 나라를 망치고 있습니다.”

“어찌 왕사는 구태의연하고 부패에 찌든 불교와 불자를 지지하시오. 신돈은 불교와 왕도정치를 개혁할 인물입니다.”

“그자는 중이 아닙니다. 그의 감언이설에 너무 귀 기울이지 마십시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죠. 절을 옮길 수는 없잖습니까?” 신돈이 두둔하였다.

“맞습니다. 중이 떠나야죠.” 공민왕이 응사하였다.

“맞습니다. 절이 싫으니 중이 떠나야겠습니다.”

 

보우는 가평 설악의 소설사로 숨어버렸다. 신돈은 그를 속리산의 작은 암자에 감금시켜 불승과 만남을 끊게 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은 왕사를 풀어주었다. 보우는 삼각산 중흥사로 와서 불교개혁을 주도하였다. 지공, 나옹, 무학을 불러 신돈의 정책을 비방하며 불교개혁을 다짐했다. 보우는 교종과 선종의 불교를 하나 되게 하는 불교개혁으로 신돈과 맞섰다. 그는 지눌의 돈오점수의 불교개혁을 계승 받아 두 종파를 하나 되게 하였다. 마침, 고려는 몽고와 신생 명나라 사이에 끼어 정치적인 혼란을 거듭하였다. 보우는 불교개혁을 완성하지 못하고 입적하였다.

 

태고종 승려들은 태고사에 증원국사탑(보물740호)을 만들고 그의 공적을 기렸다. 그리고 1385년엔 이색이 비문을 짓고 권주가 글씨를 쓴 원증국사탑비(보물611호)를 건립하였다. 그 후 태고사엔 고려말 3대 정승을 신으로 모신 삼성각을 지어 추모했다. 절에 가면 불교와 본토 샤마니즘과 충돌을 피하려고 산신각을 지어 두 종교가 교합하였다. 원래 3성신은 불교, 도교, 본토의 샤머니즘을 모시는 삼성각(산신각. 독성각. 칠성각)인데 보통 산신각 토속신만 모시고 절을 세웠다. 

 

태고사의 삼성각은 지공(선현)대사, 나옹(혜근)대사, 무학(자초)대사를 모셨다. 태고사의 4선이라 하였다. 지공(선현 1300-1361)은 인도의 승려인데 어머닌 달마왕국 공주로 붓다의 혈통이었다. 보우(태고1301-1383)태고사을 창건하였고 나옹(혜근1298-1374)원나라 유학승이며 공민왕 왕사였다. 무학(자초1327-1405)예언가이며 이성계의 왕사로 한양천도를 기획하였다. 

 

태고사 북한지 목판 인쇄소

 

나는 태고사 옛터를 걸으면서 북한지 인쇄소를 찾고 있었다. 중흥사는 군영의 본부였고 태고사엔 불경 인쇄소가 있었다. 목판각과 주물글자를 제조하는 주자소와 불경을 인쇄하는 인쇄소가 있었다. 근래에 이곳에서 목판글자 5,700자, 금속활자 11말, 화약 1,600석이 나왔다. 따라서 보우는 이곳에서 불교개혁 선교종 합 불경을 만들었고 선능은 북한산도와 북한지를 목판 형틀로 인쇄하였다. 

 

삼봉(삼각산)의 결의

 

역사의 창조, 삼각산 삼봉은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이다. 백운대 정상에서 이성계와 정도전, 무학대사 삼걸이 형제애의 혈맹을 맺은 것은 새역사의 창조를 예고하였다. 장차 그들이 무슨 일을 할지는 아무도 몰랐다. 북한산 진국사에서 요동정벌군 사령관인 이성계와 국방장관 최영이 차를 마시고 곧장 백운대에 올라 자신들의 기상을 시로 읊었다. 요동을 정벌하겠다는 욕망이 서린 시였는데 결국은 이성계가 배반하고 회군하여 고려를 부수고 조선을 건국하였다. 이 시는 조선을 건국하는 찬시가 되고 말았다. 어느 날 보우는 태고사에서 무학대사, 지공대사, 나옹대사와 불교개혁을 논하고 있었다. 보우는 교종과 선종이 화합하는 지눌의 돈오점수 이론을 펼쳤다. 

 

“썩어빠진 고려의 앞날이 풍전등하입니다.”지공이 답답한 심기를 표했다.

“불교를 개혁해야 합니다.” 나옹이 탄회 하였다.

“신돈이란 놈부터 몰아내야죠.” 보우가 한술 더 떴다.

 

한참 논의가 되고 있는데 요동정벌대 대장인 이성계가 들어왔다.

 

“노승들이 차를 마신다기에 지나다가 들렸습니다.”

“어서 오셔요. 장군, 진국사 병영이 바쁘다면서요.”

 

보우가 반색하였다.

 

“네, 그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성계는 노승들의 자리에 끼어 불교개혁과 국론의 병폐를 듣고만 있었다. 다과가 끝나고 이성계는 백운대를 향하여 걸었다. 이때 무학대사가 그를 따라나섰다. 이성계가 운을 뗐다.

 

“산세가 참 아름답지요.”

“도읍터로 좋은 기맥을 가졌습니다.”
“어디 가요....?”
“삼각산 아래 남경이 그렇습니다. 새 운기가 서린 땅입니다.” 

 

무학대사의 말이었다. 두 사람은 백운대에 올라 사방을 내려다보았다. 

 

“제가 시 한 수를 읊어보겠습니다.”

“어디 한번 들어봅시다.” 

 

등백운봉 (登白雲峰)

 

이성계

 

인수반라상벽봉 (引手攀蘿上碧峰)   
일암고와백운중 (一庵高臥白雲中)
약장안계위오토 (若將眼界爲吾土)
초월강남개불용 (楚越江南豈不容)

 

백운봉에 올라

 

손뻗어 넝쿨 휘어잡고 푸른 봉우리에 오르니
한 암자가 흰 구름 속에 높이 누워있네
눈앞에 들어오는 세상을 내 땅으로 만든다면
초나라 월나라 강남인들 어찌 정복 못 하리요.

 

그런 후 무학대사는 후학인 정도전을 데리고 삼각산에 올랐다. 새로운 야망을 가진 자들의 대화는 시작되었다.

 

“장차 저곳이 새 도읍지가 될 것이요.” 

 

무학대사의 말투엔 가시가 돕혔다. 장차 그들이 역성혁명으로 한양 천도와 도성 축성을 기획한 사람들이었다.

 

북한산성 행궁과 사찰이 불타다.

 

고인 물은 썩는다. 8도도총섭이 너무 오래 지속하였다. 산성 내 사찰이 병들고 있었다. 비밀의 요새에서 그들은 무슨 일을 했던가? 중흥사 비석거리에서 26기의 총융사와 승군 총섭 헌정비를 만난다. 북한산성을 축조할 때 물심양면으로 애쓴 승려들과 총융사 장수들의 공을 되새겨 놓은 비석들이다. 과연 그들이 축성에 공을 세운 자들인가? 가파른 산영루 벼랑에 부러진 비석이 애처롭다. 왜 다시 복원을 안 하고 있을까. 온갖 비리의 표상이었다. 축성 이후에 승직과 관직을 사고파는 부패의 요람이 되었다. 돈으로 벼슬을 사려고 온갖 잡생이가 다 모여들었다. 산성을 짓고 그곳 별천지에 남은 승려와 병사들이 추악한 짓을 하였다. 돈을 주고 벼슬을 사서 자신의 선정비를 다투어 세웠다.

 

그만큼 북한산 중흥사는 8도도총섭 승려들의 퇴폐한 도굴이었다. 게다가 총융사 관리들의 횡포는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총융사엔 중군장 1명 천총장 2명 파종4명 촤관 26명, 군관 501명이 있었는데 이들이 직위를 판 도둑이 되었다. 이들 승려들은 전국의 사찰을 상대로 돈을 뜯어냈고 총융사는 벼슬을 팔려고 전국을 순회하였다. 중흥사 사하촌엔 부정 축재한 군량미가 산처럼 쌓였다. 

 

비석거리에 부러진 비석들이 방치된 것은 그들이 매도한 벼슬아치들이기 때문이었다. 그 내용을 비판하는 글귀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북한승도졸목비문’ 8도도총섭 임명과 총융사 장수 등용의 폐단을 고발한 비문이다. 그 대표적인 자가 민영준이다. 그는 북한산 총융사 경리청에 있으면서 엄청난 재벌이 되었다. 

 

갑신정변 개혁자들이 북한산성이 비리의 온상임을 알고 사원과 승병을 해산하는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북한산 사찰에 불이 자주 났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처결되던 해에 북한산 행궁과 사찰이 모두 불탔다. 일본군이 동학 의병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모든 사찰에 불을 질러 버렸다. 승벌이 해산되고 불탄 절은 폐허가 되었고 1915년 대홍수로 모든 사찰이 무너져 버렸다. 그리고 1925년에 대홍수로 절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북한산 승영사찰과 행궁은 사라져 버렸다. 

 

누가 북한산성 사찰과 행궁을 불태웠는가? 일제인가? 갑신정변 개혁자들인가? 그 슬픈 비극은 북한산성만이 알고 있었다.

 

[김용필]

KBS 교육방송극작가

한국소설가협회 감사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마포지부 회장

문공부 우수도서선정(화엄경)

한국소설작가상(대하소설-연해주 전5권)

이메일 :danmoon@hanmail.net

 

작성 2023.11.22 10:39 수정 2023.11.22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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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