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영의 낭만詩객] 아지매는 할매되고

이순영

시장통 술집은 늘 중년의 사내들로 붐빈다. 호주머니 사정이 만만치 않은 중년의 사내들은 시장통 모퉁이 술집에 앉아 막걸릿잔을 기울이며 한바탕 씨부렁거려야 직성이 풀린다. 이마에는 계급장처럼 주름살 몇 개씩 매달고 질펀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빌어먹을 세상을 조롱한다. 왕년에 금두꺼비 키우던 이야기며 대기업에 다니는 큰아들 자랑이며 비혼을 선언한 딸년을 흉보다가 이제 나이 들어 노동시장에 밀려나 일하는 날보다 노는 날이 더 많다고 하소연할 땐 촉촉해지는 눈가를 들키지 않기 위해 막걸리를 벌컥벌컥 들이켠다. 불쌍한 남자들, 불쌍한 아버지들을 위로하는 건 시장통 술집 막걸리뿐이다.

 

온몸에 도덕을 액세서리처럼 치렁치렁 달고 다니는 사람들은 모른다. 후미진 술집의 낭만을, 가난이 있는 저녁의 구수한 농담을, 늙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에 어린 슬픔을 모른다. 안줏거리로 대통령도 씹고 공자도 씹고 잔소리만 해대는 마누라를 씹으면 술은 술술 넘어가고 기분은 날아갈 듯 좋아진다. 그럭저럭 자식 다 키워 놨으니 이만하면 밑지는 장사는 면했는데 그래도 자꾸 서글퍼지는 인생 어디에다 하소연하겠는가. 시장통 인심 좋은 술집 아줌마에게 농담이라고 건네면서 술잔 주고받으면서 위로받는 중년의 사내들이다. 

 

염매시장 단골술집에서

입담 좋은 선배와 술을 마실 때였다

 

막걸리 한 주전자 더 시키면 안주 떨어지고

안주 하나 더 시키면 술 떨어지고

이것저것 다 시키다 보면 돈 떨어질 테고

얼굴이 곰보인 주모에게 선배가 수작을 부린다.

“아지매, 아지매 서비스 안주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주모가 뭐 그냥 주모가 되었겠는가.

묵 한 사발하고 김치 깍두기를 놓으면서 하는 말

“안주 안 주고 잡아먹히는 게 더 낫지만

나 같은 사람을 잡아먹을라 카는 그게 고마워서

오늘 술값은 안 받아도 좋다” 하고 얼굴을 붉혔다.

 

십수 년이 지난 후 다시 그 집을 찾았다

아줌마집은 할매집으로 바뀌었고

우린 그때의 농담을 다시 늘어놓았다.

아지매는 할매 되어 안타깝다는 듯이

“지랄한다 묵을라면 진작 묵지”

 

걸쭉한 농담이 낭만이 되는 저녁이다. 술이 있고 친구가 있고 술집 아지매가 있으니 중년 사내들의 저녁은 그럭저럭 행복하다. 술고래들은 안다. 술 떨어지면 안주시키고 안주시키면 술 떨어지다가 밤은 깊어 가고 마지막 버스도 끊겨 차가운 밤거리에서 몇 번이나 방황했던가. 서민들의 애환은 술이 빠지면 섭섭하다. 거기에 입담 좋은 주모라도 있으면 술맛은 그만이다. 인생이 별거인 양 호들갑 떨어봤자 다 거기서 거기다. 돈이 없어서 그렇지 가오가 없진 않다. 늙어가는 사내들의 모습은 비 맞은 비둘기처럼 처량하지만, 술집에서 부리는 호기 하나로 세상 다 가진 사람이 된다. 

 

이 쌈박한 시를 지은 사람이 대구 시인 허홍구다. 이 시는 쌈박하다 못해 허허롭다. 허허롭다 못해 애잔하다. 삶이 무엇이기에 술이 빠지면 섭섭하고 술이 넘치면 패가망신하는가. 위로받지 못하는 마누라보다 위로해 주는 술집 아지매와 나누는 질펀한 농담은 고단한 인생을 잠시 내려놓게 한다. 한바탕 수다를 떨며 쭉 들이켜는 막걸리 한잔에 먹먹했던 가슴이 쭉 내려간다. 이상하다. 중년의 사내들은 불쌍할수록 미묘하게 정이 간다. 중력을 잊은 것처럼 필사적으로 삶에 매달리는 찌질한 낭만도 아름답다. 함부로 던지는 짓궂은 농담도 그냥 눈 찔끔 감고 웃어주게 된다. 

 

이 시는 어려운 시어도 없다. 예쁘게 포장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냥 하늘 한 번 올려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시다. 허홍구 시인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시처럼 뚝배기 같은 사람일 것 같다. 술맛을 아는 사람은 삶맛도 안다. 삶맛도 아는 사람은 정맛도 안다. 따뜻한 사람들은 술을 좋아하지만 넘치지는 않는다. 술이 삶의 일부분이 된 것은 메울 수 없는 깊은 가슴 속의 허망함 때문일 것이다. 술 마시는 중년의 사내들이 있는 풍경은 대구 염매시장 후미진 술집처럼 따뜻하다. 그냥 따뜻한 것이 아니라 쓸쓸하면서 따뜻한 풍경화다. 

 

술집에서 막걸리 한 주전자 더 시키면 안주 떨어지고 안주 하나 더 시키면 술 떨어지고 이것저것 다 시키다 보면 돈 떨어져 본 술꾼들은 다 안다. 이 시의 참맛을 다 알고도 남는다. 내가 알고 있는 지인 하나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직장 다니면서도 가슴이 채워지지 않아 술집에 드나드는 일이 많았다. 술에 잔뜩 취해 택시를 잡아탔는데 택시비가 없었다. 그는 종이 쪼가리에 짧은 시를 써서 택시비라고 주었다. 나중에 자기가 유명해지면 이 시는 지금의 택시비보다 더 값진 것이 될 거라고 했지만 그의 호기를 알아보지 못한 택시 기사는 경찰서로 택시를 몰고 갔다. 결국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어느 대안학교 국어 선생이 되었다. 그가 시인 지망생이었다는 건 나중에 알게 되었다. 술 좋아하는 사람들의 낭만은 때론 독이 되고 때론 시가 된다.

 

“아지매, 아지매 서비스 안주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지랄한다 묵을라면 진작 묵지”

 

 

[이순영]

수필가

칼럼니스트

이메일eee0411@yahoo.com

 

작성 2023.12.07 11:22 수정 2023.12.07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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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