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수 칼럼] 합포해전지는 마산 합포다

조선시대 마산포는 합포에 속한 하나의 포구였다

고려시대의 합포가 임진왜란 당시에는 마산포였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

이순신장군은 1592년 첫 번째 출전을 마치고 조정에 ‘옥포파왜병장(玉浦破倭兵狀)’ 장계를 올리면서 합포해전지를 '웅천땅 합포 앞바다(熊川地 合浦前洋)'로 기록하였다. 다음은 그 해당 기록이다.

 

“신시경(오후 3시~5시)에 멀지 않은 바다에 다시 왜의 대선 5척이 지나간다고 척후장이 보고하기에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이를 쫓아서 웅천땅 합포 앞바다에 이르자 왜적들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갔습니다.” 

 

필자는 합포해전지가 ‘마산 합포(合浦)’이며 ‘진해 학개(鶴浦)’는 될 수 없다고 일관되게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일부 연구자들은 위 장계의 ‘웅천땅 합포’라는 말에 매몰되어 임진왜란 당시 존재하지도 않았던 지명인 진해 학개를 합포해전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이 내세우는 논거 중 하나는 이순신 장군의 장계인 ‘당포파왜병장’에 ‘웅천땅 합포’와는 다른 ‘창원땅 마산포(昌原地馬山浦)’라는 지명이 따로 나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고려시대의 합포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마산포로 바뀌었으므로, 옥포파왜병장에 언급된 합포는 지금의 마산 지역과 관련이 없다”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와 관련하여 진해 학개가 합포해전지라고 주장하는 연구자 중 한 분이 2025년 3월 30일자 경남신문 기고에서, “웅천현은 지금의 진해이지 마산은 아니다. 마산은 당시 창원부에 속했다. 임진왜란 직후 선조실록에도 마산포는 고려시대의 합포라고 기록되어 있다”라는 논지를 펼쳤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조선시대 마산포’는 ‘고려시대 합포’가 아니다. 조선시대 마산포는 하나의 작은 포구에 불과한 지역이었다. 예를 들어 1789년에 간행된 ‘호구총수’를 살펴보면 당시 마산포는 창원부 서면(西面)에 속한 여러 리(里)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대동지지’ 등의 지리지나 ‘창원읍지’ 같은 읍지류를 살펴보면 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한국고전종합DB 홈페이지(db.itkc.or.kr)에서 ‘마산포’를 입력하면, 조선시대의 마산포 관련 자료가 곧바로 화면에 나온다. 또한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홈페이지(kyu.snu.ac.kr)에서도 ‘마산포’를 검색하면, 고지도를 포함한 조선시대의 마산포 관련 자료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마산포가 창원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으로 떠오르게 된 것은 1898년 외세의 압력으로 마산포를 개항하고 나서부터이다. 마산포가 개항되자 외국인거류지가 설치되어 일본인들이 와서 거주하기 시작했고, 그 때문인지 일제는 조선을 강점한 후 창원부를 마산부로 개칭하였다. 

 

마산의 근대사는 ‘창원도호부권역 지명연구’(민긍기, 2000), 마산포럼 홈페이지www.masanforum.or.kr), ‘허정도와 함께 하는 도시이야기’ 홈페이지(www.u-story.kr) 등과 같은 여러 훌륭한 연구 자료 등을 통해 참조할 수 있다. 

 

마산은 개항 이후 일본인들이 많이 드나들던 곳이기 때문에 일본 측 자료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일본국회도서관 홈페이지(www.ndl.go.jp/ko/index.html)에서 '馬山'을 입력하면 마산과 관련한 근현대 일본 자료 수백 건을 찾을 수 있다.

 

조선시대의 마산포는 당시 합포 지역에 속했던 포구이다. 합포는 마산포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하나의 포구에 국한된 지명이 아니었다. 고려시대에 합포로 불리던 지역의 지명은 공식적으로는 고려말에 ‘회원’으로 바뀌었다. 또한 조선 태종 때 회원과 의창을 병합하여 창원으로 바꾸는 과정을 겪으면서 ‘합포’는 공식적으로는 창원의 한 포구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국한되었다. 

 

동여도

 

그러나 합포가 본래 가지고 있던 지명과 영역은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왔기 때문에 쉽게 잊히지 않았다. 김종직(1431~1492)의 ‘점필재집’, 1587년에 편찬된 함안군 읍지 ‘함주지’, 이긍익(1736~1806)의 ‘연려실기술’ 등의 여러 조선시대 문헌은 합포를 ‘합포현’으로 서술함으로써, 합포를 포구가 아닌 창원의 일부 지역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조선시대 합포 지명과 관련하여 가장 흥미로운 문헌은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편찬)에 수록된 창원도호부 ‘성씨조’이다. 이 기록은 창원의 토성(土姓)을 설명하면서 창원 지역을 ‘의창’과 ‘합포’ 두 지역으로 나누어 기록하였다. 태종 때 회원(합포)과 의창이 창원으로 통합되고 약 10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창원을 ‘의창’과 ‘합포’ 두 지역으로 구분한 점이 눈여겨볼 만하다. 

 

더 흥미로운 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포구’로서의 ‘합포’와 ‘마산포’ 두 지명에 대한 설명도 수록되어 있다. 합포가 ‘포구’와 ‘현’ 두 가지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으로 사용된 셈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합포는 지금의 마산만 바다도 포함하는 지명이다.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사료도 있다.

 

선조실록에 마산포가 고려시대의 합포라고 기록된 것을 근거로 하여 ‘조선시대 마산포=고려시대 합포’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마도 선조실록의 1603년 기사(권162, 선조 36년-1603년 5월 2일 정사 5번째 기사)를 보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기사는 당시 비변사가 선조에게 아뢰는 바를 기록한 자료로서, 비변사가 마산포를 옛날의 합포라고 언급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당시 합포(합포현) 지명이 공식적으로는 창원으로 바뀐 상황이었기 때문에 비변사가 이런 내용으로 아뢴 것이다. 위에서 설명한 합포 지명의 연원과 변화 과정을 살펴보아야 선조실록의 기사에 나온 내용이 어떠한 배경에서 서술된 것인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이 기사의 내용만으로 ‘조선시대 마산포=고려시대 합포’라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명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자료의 표면적인 문구만 가지고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요컨대 조선시대의 마산포는 당시 합포 지역에 속한 하나의 포구에 국한된 지명이다. ‘당포파왜병장’에 '창원땅 마산포(昌原地馬山浦)'라는 문구가 나온다는 이유로 ‘옥포파왜병장’에 언급된 합포가 '창원부 합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러한 논리는 고려시대 합포 지명, 조선시대 합포와 마산포 지명, 현재의 합포와 마산포 지명을 혼동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이다.

 

 

[이봉수] 

시인

이순신전략연구소 소장

https://yisoonsin.modoo.at

 

작성 2025.04.01 21:04 수정 2025.04.02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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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