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은 정치다.” 국제 금융시장에서 오래된 이 말이 다시 소환됐다. 미국 재무부가 최근 한국을 ‘환율관찰대상국’으로 재지정하면서 한국의 외환정책이 도마 위에 올랐다. 단순한 기술적 판단으로 보기엔 시점과 대상국 모두 정치적 해석의 여지가 크다. 글로벌 환율 전쟁의 조짐이 감지되는 가운데, 한국은 어떤 시그널을 읽어야 할까?
환율관찰대상국 지정은 국제 통화질서에서 일종의 ‘경고’를 의미한다. 미국은 반기마다 주요 교역국을 분석해 특정 요건을 충족하면 이 목록에 포함시킨다. 올해 상반기 보고서에서 한국은 대만, 중국, 독일 등과 함께 다시 이름을 올렸다. 미국의 이 같은 조치는 시장과 정책 당국 모두에 강한 압박으로 작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결정은 어느 정도 예고된 수순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원화의 급격한 절하, 외환시장 개입 의혹, 여전히 높은 대미 무역흑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관심은 단순한 환율 수준 자체보다, 환율이 인위적으로 조정된 흔적이 있는가에 맞춰져 있다. “시장 친화적”으로 불려온 한국의 외환정책이 의심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번 재지정은 단순한 기술적 분류를 넘어선다. 이는 향후 국제무역 협상이나 통화정책 운용에서 중요한 변곡점이 될 수 있다. 한국은 이 상황을 어떻게 돌파할 수 있을까?
한국이 환율관찰대상국으로 재지정된 이유는 미국이 제시한 세 가지 기준을 모두 충족했기 때문이다. 미국 재무부는 ▲대미 무역흑자 150억 달러 이상, ▲경상수지 흑자 GDP 대비 3% 이상, ▲외환시장에 대한 일방향 개입(GDP의 2% 이상) 여부를 중심으로 판단한다. 한국은 이 모든 조건에 해당했다.
특히 대미 무역흑자는 수년째 지속되고 있는 구조적 현상이다.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이 자동차, 반도체, 배터리 등 전략 산업에서 계속해서 수출 우위를 점하는 점이 불만일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무역 불균형이 환율정책과 결합되면서 ‘불공정’이라는 프레임으로 해석된다는 점이다.
두 번째 요인은 외환시장 개입이다. 한국 정부는 시장 안정화 목적이라고 수차례 밝혀왔지만, 미국은 “그 개입이 시장에 어떤 신호를 주었는가?”에 집중한다.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원/달러 환율이 1,400원에 근접하며 변동성이 확대되자, 당국의 ‘스무딩 오퍼레이션’이 잦아졌고, 이 부분이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세 번째는 경상수지 흑자다. 제조업 중심의 경제 구조와 높은 수출 의존도로 인해 경상수지 흑자가 자연스럽게 발생하고 있으며, 이는 미국의 환율 감시 기준상 경고 요인이 된다.
결국, 한국은 의도와 무관하게 기준 충족이라는 명확한 수치 앞에 재지정을 피할 수 없었다. 문제는 앞으로다. 수출 구조를 단기간에 바꾸는 것은 어렵고, 외환시장 안정화도 포기할 수 없다면, 무엇을 어떻게 조정해야 할까?
한미 경제 외교의 긴장감, 그리고 금융시장의 반응
이번 조치는 외교적으로도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2022년 한국이 환율관찰대상국에서 제외된 이후, 한미 양국은 전기차 보조금, 반도체 공급망, IRA 법안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긴밀히 협력해왔다. 그러나 이번 재지정을 통해 미국은 다시금 환율을 경제적 압박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시장 역시 민감하게 반응했다. 한국은행과 기획재정부는 “환율정책은 투명하게 운용되고 있다”고 즉각 해명했지만, 외국인 투자자들은 한국의 외환정책이 향후 더욱 제약받을 수 있다는 우려를 드러냈다. 이는 자본 유출 위험과 통화정책의 운신 폭을 제한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더불어 환율이 급등락하는 환경에서 한국 기업들의 환리스크 관리도 더욱 중요해졌다. 특히 수출 비중이 높은 중소기업은 환 헤지 전략을 강화하지 않으면 직접적인 피해를 입을 수 있다. 금융기관들 역시 대외신인도 관리를 위해 선제적인 대응이 요구된다.
무엇보다 이번 조치가 향후 한미 간 통화스와프 재협상이나 금융 협력 논의에서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도 주목해야 한다. 미국은 환율관찰대상국에 대해 더 높은 투명성과 보고의무를 요구하며, 경우에 따라 환율조작국 지정까지 이어질 수 있다.
이제 한국은 단순히 환율관찰대상국에서 벗어나는 수준을 넘어, 외환정책 전반에 대한 국제 사회의 신뢰를 회복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를 위해선 환율 개입 내역 공개 범위 확대와 외환보유액 운용의 국제 기준 충족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일본은 2022년 엔화 급락 시 강력한 개입을 단행하면서도 그 내용을 신속하게 공개해 시장의 신뢰를 얻었다. 한국도 2023년부터 분기별 개입 내역을 공표하고 있으나, 아직은 국제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다. 정보의 투명성은 시장을 안심시키는 가장 강력한 수단임을 인식해야 한다.
또한 외환정책을 총괄하는 부처 간 조율도 절실하다. 한국은행, 기획재정부, 금융위원회 등 각 기관이 상이한 이해관계를 갖는 가운데, 외환정책이 일관된 원칙에 따라 운영되기 위해선 확실한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
아울러 수출 중심의 경제 구조에서 벗어나 내수 활성화 및 산업 다각화를 추진하는 중장기적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대미 무역흑자를 구조적으로 완화시킬 수 있으며, 환율 감시 대상에서 벗어나는 실질적인 방안이 될 수 있다.
'통화'는 기술이 아닌 신뢰의 문제다
이번 환율관찰대상국 재지정은 단순한 수치 기준 충족을 넘어서, 한국 외환정책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 점검으로 볼 수 있다. 외환시장에서의 투명성과 자율성, 그리고 글로벌 스탠더드를 따르는 태도가 요구된다.
한국은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팬데믹 등 여러 차례 위기를 돌파해온 경험이 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책의 정교함과 시장 및 국민의 신뢰를 함께 확보할 수 있는 ‘외환 정책 리더십’이다.
“환율은 신뢰의 거울이다.”
국제사회가 다시 한국을 주목하고 있다. 이제는 우리가 그 시선을 어떻게 마주할지가 중요하다.
[칼럼 제공: 이원우 박사]
국제통상학박사
ww-lee-36@hanmail.net
동국대학교 외래교수
한국협상학회 이사
국제이비즈니스학회 이사
한국협상학화 윤리위원회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