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열전 靑年 列傳] 페인터 마빈킴, 김도엽

잔 브릴리언트

 


오랫동안 끌어왔던 작품을 마무리했다. 완성의 홀가분함을 느끼기도 전에 얼른 새 캔버스를 가져왔다. 앉아서 작업하느라 뜨뜻해진 바닥이 채 식기도 전에 앉았다. 시계를 확인하고는 그럼 그렇지, 벌써 새벽이다. 오늘은 꼭 일찍 자리라는 나의 다짐은 역시나 무산됐다.

 

종이 팔레트도 바꾸고, 네 칸으로 나누어진 물통은 이미 세 칸이나 더러워져 깨끗한 물로 갈아왔다. 내가 더운 탓에, 붓까지 더워 보이는 것 같아 괜히 물에 담가 휘휘 저어봤다. 곧바로 시작하기 위해 해놓은 스케치들이 여간 마음에 들지 않아 시간만 보내는 것이다. 그러다가 번뜩 하나가 생각, 갈팡질팡 하던 모습을 감추듯, 과감하게 연필로 그려낸다.

 

얼마간 이리저리하더니 물감튜브 하나를 집어 든다. 엄지손가락 만하게 짜내어 여기저기 바른다. 그러나 다음날이 되자마자, 호기롭게 출발했던 것이 무색하리만큼 얼른 다른 색으로 바뀐다. 이내 숨길 수 없는 속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이게 아닌데…….”

 

방향을 잃은 듯 휘갈겨 놓은 선과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색면들이 날 비웃고 있는 듯하다. 아까와 다름없이 제자리에 있을 뿐이지만. 타올랐던 불꽃이 섭섭하여 붓을 잠깐 내려놓기로 한다. 때마침 걸려오는 친구 놈의 전화에 마음도 쉬어가기로 했다. 몇 분간 통화를 하다가 곧장, 전쟁터로 향하는 군인처럼, ‘그놈이 있는 쪽으로 돌아간다. 눈싸움하길 몇 분, 이 다툼의 서막이었던 스케치에 시선이 향한다.

 

스케치를 새로 해보자,

스케치부터 마음에 들게 해보자.’

 

심기일전으로 기초공사를 다듬는다. 썸네일의 사각형으로 종이를 채워나간다. 서너 장쯤 채워졌을 무렵, 겨우 한 개쯤 건져 올렸다. 이 조그만 네모 칸 속 어지러이 채워진 낙서들에, 어제의 실패와 그에 대한 반성과 오늘의 각오가 담겨있으리라. 이번엔 확실하다는 듯 흔히 살색으로 부르는 색. 본인의 경우 스케치를 하기 위해 사용하는 가장 기본이 되는 색을 들었다. 그리고 마치 영상을 되감기 하듯, 잔 브릴리언트 색 튜브를 쥐었다.

 

엉켜있는 물감들 위로 붓질이 슥슥 소리를 내며 움직인다. 지나간 과거 위에서 선명하게 대비를 이루며 퇴적된 현재의 자국들이, 무언가 외곽선을 만들어낸다. 뼈대에 살을 붙이려 다른 색깔을 골랐다. 완성은 언제쯤 다가올지 모르겠다만,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 무게를 기울인다. 벌써 물통 네 칸 중 3칸이 더러워지고 남은 한 칸마저 회색빛이 돌고 있었다. 아직 검정빛이 되려면 두 번 정도 더 씻을 수 있겠지만, 화장실 다녀오는 그 짧은 거리만큼이라도 머리를 환기시킬까 일어선다.

 

온갖 고민이 담긴 까만 물을 쏟아내고 돌아와 작업을 바라보니, 스케치와 일정 부분 다른 것을 알아챈다. 두 번이나 반복된 계획의 틀어짐에서 작은 깨달음(거창하진 않으나 이 단어를 대체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이 떠올랐다.

 

시작과 끝을 계획하려 했다. 그로 인해 자연스레 틀과 규칙들이 생겼고, 그로부터 멀어질수록 힘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가만히 되뇌어보니, 참으로 많은 부분을 조절하고 계획하고자 했다. 완성될 형상을 포함하여,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사용할 색깔이나 심지어 붓 터치까지도! 그림이 어디 짜여있는 대로 흘러간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는가? 화려한 무늬를 채워 넣으려던 배경은 그냥 단색으로 처리되기도 하고, 과장하여 왜곡시킨 형태는 실재와 타협하기 일쑤였다. 새로운 배색을 시도해보려 골랐던 물감들은, 낯선 곳에 떨어진 여행자가 눈에 익은 길을 찾으려 노력하듯 익숙한 색채들로 교체되었다. 그뿐인가. 한 가지 스타일로만 담길 줄 알았던 화면은 계절이 바뀌듯 계속해서 변천되어왔다.

 

이처럼 생생한 이미지가 머릿속에 떠올라 증발하기 전에 담아냈던 스케치는, 예고 없이 개입하게 되는 즉흥과 일종의 반항심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전혀 다른 목적지에 도착하게 된다. 그곳이 더욱 나쁠 수도 있다는 점은 배제할 수 없다. 동시에 예견할 수 없는 여정이 가져다주는 즐거움도 무시할 수 없으며, 적어도 나의 경우, 결과 역시 나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것도 많은 부분에서 비슷하지 않은가.

 

끊임없이 모든 것을 예상하고 판단하려 하는 혹은 그럴 수밖에 없음은, 실로 피곤한 진실이 아닐 수 없다. 전설적인 록 밴드 비틀즈의 보컬 존 레논John Lennon (1940~1980)은 이러한 현실에 대해 이렇게 일침 했다.

 

인생이란 네가 다른 계획을 세우느라 바쁠 때 일어나는 것이다. Life is what happens to you while you’re busy making others plans.”

 

그의 말처럼 불필요한 바쁨을 추구하느라 많은 것을 놓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라면을 끓이면서 계란을 빼먹는 정도라면 다행이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 개인의 건강, 가족과 보내는 한정된 시간 등을 포함한 소중한 어떤 것들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않을까. 거스를 수 없는 물리의 법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현재의 순간과 발생할 수 있는 가치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보자.

 

지나간 과거를 아는 것은 어느 정도 미래를 대비할 수 있겠으나 우리는 현재에 존재하며, 현재 역시 당장에 지나갈 과거이지 않겠는가. 이는 계획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 얽매임에 대한 경계이다. 또한 친근함과의 환송이자 생소함을 위한 환영이리라. 다음 단계로의 발전을 도모하고, 나아가 내면의 해방으로 하여금 스스로에게 보다 객관적인 관조를 통한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함이다. 나 역시 부단히 노력해야 할 부분임에 틀림없다.

 

깜빡 잊고 있던 캔버스로 시선이 옮겨질 때쯤 휴대폰 화면엔 어느덧 이 바뀌어 있었다. 괜히 내일만큼은 정말 일찍 자리라 다짐해본다. 더럽혀질 물엔 그저 붓만 덩그러니 담긴 채 있다. 창밖으로 취객의 고함소리가 들린다. 폭주족의 요란한 오토바이 엔진 소리, 누군가 옥상에 묶어놓은 개가 목청껏 짖는 소리도 울려온다. 매일 같이 들리는 소리이지만 오늘만큼은 그것이 소음이라 핑계 대며 붓은 더 이상 잡지 않는다. 다만 캔버스를 응시하며 앞으로 채워질 변화의 흔적들을 기대하고 있을 뿐이다.

 


서문강 기자
작성 2018.08.20 10:26 수정 2018.08.22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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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