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韓流)의 시발점, 당성(唐城)과 화량진성(花梁鎭城)을 살피다>
송산면 지화리 서쪽지역 끝머리에 큰딱섬, 능수도, 작은딱섬 세 개의 섬이 있다. 시화호 조성 이전에는 섬이었다. 지금은 수변습지로 조성되어 있다.
지척의 습지와 이어지는 남경산(南京山) 산록에 화량진성(花梁鎭城)은 일명 남경산성(南京山城, 남경두토성)이라고 한다. 또한, 당성(唐城)아래 전곡리 ‘은수포(銀樹浦)’와 중송리 ‘솔미포구’로 이어지는 갯골을 ‘남경천’이라하였다.
화량진성(花梁鎭城)을 고려 때 축조된 성곽이라고 일부 자료에 비정하고 있다. 옛날 삼국시대 때부터 서역진출 거점으로 당성(唐城)은 중요했고 바다로 나아가는 관문 포구와 서해의 통제가 중요하였다. 나당연합으로 백제, 고구려를 쟁취한 신라는 당성군(唐城郡)을 당은군(唐恩郡)이라 이름 바꿨으나, 당나라 세력을 몰아낸 통일신라는 대당(對唐)강화를 위하여 주요 해안지역에 진(鎭)을 설치한다. 이때 경기만(京畿灣) 연안 당성군에 당성진(唐城鎭), 안산지역에 장구진(獐口鎭), 강화지역에 혈구진(穴口鎭)을 두어 해안지역 방어에 치중하였다. 당성(唐城)을 육군진으로, 화량진성을 수군진(水軍鎭)으로 협성개념의 성(城)과 진(鎭)은 당성지역의 견고한 방어가 이루어졌을 개연성이 크다. 백제, 고구려, 신라가 국운을 걸고 각축하였던 한반도 쟁패거점으로 당성(唐城)과 은수포(銀水浦)가 대중국 최초 개항포구이며 한반도 실크로드 ‘당은포로(唐銀浦路)’의 시발점이라는 점이다.
이후 고려 때 개편되어 화량진이라 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당성 아래, 당곶(唐串) 은수포(銀樹浦)의 조수가 얕아지면서 건너편 화령(송산면 지화리)지역에 수군진(水軍鎭) 화량진성(花梁鎭城)을 축성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삼남지방에서 올라오는 조운선과 경기만의 내만 군자만(君子灣)의 길목 마산수로(馬山水路)와 경기만과 서해를 효과적으로 통제하였을 것이다. 이후, 고려 전기까지 남송과 명나라의 수도 남경(南京·난징)으로의 뱃길은 여전히 경기만 당성을 출발항으로 사용하였기에 남경 관련하는 지명이 등장하는 까닭이다.
고려중기 이후 개성(開城)으로 보다 쉽게 접근하기 위하여 강화도 북단 한강과 임진강으로 분기하는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碧瀾渡)로 서역 진출입 거점을 옮겨가게 되었다. 고려 말 1231년(고종18) 몽골군의 침입 이듬해 강화도(江華島) 천도 후 몽골과 화친조약 후 개경환도에 반대하는 무신들이 주도한 ‘삼별초의 난’이 경기만 섬 지역으로 펼쳐졌다. 이후 여몽연합군(麗蒙聯合軍)에 의해 1273년 진압된다. 1350년부터 1392년 고려가 막을 내리는 40여 년간 왜구는 394회 왜구의 침입했다. 1358년 8월 화량진에 침입한 왜구는 병선과 ‘화지량(花之梁)’수진진영을 불태우고 인명을 살상하는 극악을 부렸다. 이후, 고려는 더욱 피폐해져 국운을 다한다. 조선 전기까지도 왜구의 극성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속담을 연상케 한다. 바다가 육지가 되었다. 쉼 없이 일렁이는 푸르른 창해(蒼海)의 파도가 황금이삭 여물어 일렁이는 이 땅은 본시, 겨레민족의 결사가 면면하여 역사문화 한류(韓流)가 발흥하여 서역곳곳으로 펼쳐나가는 땅, 시대 흐름갈피마다 국난극복 구국충정의 숨결 분연하게 기치 세운 땅이었다.
세월은 흘러 흘러... 1994년 시화호 물막이 공사 이후 바다를 비워내었다. 서해 바닷물 잠겨들던 산자락 뿌리 끝, 흩어진 성벽길은 끊어지고 오랜 세월을 소리 없이 시름 앓고 있다.
화량진 일대의 딱섬과 능수도(綾樹島)의 새로운 인식
옛 사람들은 남양지역 바다를 해향(海鄕)이라거니, 해포(海浦)라고 하였다. 신라 때 당나라에서 당홍의 선시조 홍천하가 639년(고구려 영유왕(榮留王22) 8학사의 한 사람으로 고구려에 왔다가 통일신라에서 벼슬하여 당성후(唐城候)에 봉해졌다는 입항지가 당성 아래 은수포(銀水浦)라 하여 남양(南陽) 홍씨들의 래향(來鄕)이란 기록은 은수포의 중요성을 짐작케 한다. 고려 때 이색(목은牧隱)이 남경으로 가던 길에 당성에 올라 시를 읊었다는 기록이나 숱한 시인묵객이 당성지역을 노래했다는 역사 기록은 얼마든지 남아있다. 화량진성과 관련하여 능수도(綾樹·繡島)라는 섬의 대석에 ‘능수도’라 글씨가 새겨져 있다는 기록이 전한다. 또한 화량진성에 있었다는 남정자(南亭子)에는 홍언간의 시가 편액 되었다는 기록이 「남양읍지」등에 전한다. 지화리 매화동에 살았던 이옥(李鈺)은 영조~정조~순조 연간의 문사(文士)로 정조와의 문체반정(文體反正)으로 유명하다. 그가 남긴 글에 자기 집 마을 앞에 화지량(花芝梁)이란 곳이 있는데 100여척의 함선과 1,600여 군인들의 매일 아침저녁으로 나각소리와 함성소리가 들린다는 등 당시의 다양한 인문정보를 기록하고 있다.
송산면 지화리 장문마을 바닷가의 ‘할미바위’와 ‘용천수’가 시화호 물막이로 공사로 아무런 조사나 보존노력 없이 파괴되었으며 농지조성으로 할미바위에 얽힌 인본덕목의 전설마저도 소멸되어졌다. 2013년 <화성-당성 싵크로드의 연원을 찾아서>탐방대 행사에서는 송산면 고포리 어도 개펄 매립지에 탐방대원들을 이끌고 가서 마산포(馬山浦)가 역사의 현장, 당나라로 이어지는 최초 개항지라고 안내하는 역사왜곡의 촌극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산포는 1800년경에 들어 홀수 깊은 이양선이 등장하면서 수심 깊은 수로에 면한 ‘마산포구’ 일대가 이용되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화성의 역사를 아무렇게나 이야기하였다.
또한, 전곡항과 지척의 마산수로와 연결되는 지화리 남경천수로의 큰딱섬, 작은딱섬, 능수도 일대는 경관이 수려한데도 원형 자연환경 보존작업이나 인문기록 조사작업이 충분하지 않았다. 농어촌공사에서 편의적 해안습지를 조성하여 대송지역 저수용지로 사용하고 있다. 낚시객의 휴식장소로 무분별한 쓰레기장으로 방치되어 환경오염과 공장과 유락시설 등이 들어서 환경미관이 훼손이 매우 심각한 상태이다.
관방(關防) 역사문화 유산, 지역자존의 정신마저도 방치되어 자취마저 소멸되어가고 있다. 화량진(花梁鎭)과 화량진성(花梁鎭城)은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큼에도 역사문화를 소홀히 함으로 문화재는 발굴보존 등록되지 않았고 무분별한 난개발로 소중한 역사유적 화량진성(花梁鎭城) 일대에 공장과 펜션 등으로 훼손되어지고 있다. 수도권 휴양문화 터전으로 제부도, 전곡항, 궁평항의 해양문화와 연계된 역사문화 유적으로 화량진성 일대, 당성, 청명산성을 재인식하여 화성서부지역 문화유산이 발굴 보존되어야한다. 화성은 다양한 문화와 물산의 보고로서 화성인의 자존을 세우는 인문가치의 전환이 요구된다.
그간 왜곡된 중앙사 편린으로 위축된 향토 역사문화 가치를 탈피하여 서해안시대 시작의 역사적 당위성을 주도하는 화성의 사활쟁점으로 중요하다. 고대, 서역으로 나아가는 실크로드의 반전 축으로 경기만의 당성(화성지역)이 갖는 역사문화의 정대한 인식정립이 필요하다.
화성향토역사문화연구소 박대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