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완규
한국클래식음악신문 칼럼니스트 / 기자
2013년 뮤지컬 시카고를 보았다. 2020년 7년이 지난 지금도 그 무대, 그 감격은 내 마음속에 아직 살아 숨쉰다.
뮤지컬 시카고를 통해 인간 부조리의 끝은 어디인지, 이율배반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 실체를 다시 한 번 들여다 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먼저, 뮤지컬 시카고의 시놉시스를 소개한다.
재즈의 열기와 냉혈한 살인자들로 만연하던 1920년대 시카고
서곡이 끝나면서 벨마 켈리가 등장한다. 보드빌 배우였던 벨마는 자신의 남편과 여동생의 불륜 현장을 목격하고 살인을 저지르고 쿡 카운티에 수감 된 화제의 여죄수,
코러스 걸인 록시 하트는 나이트 클럽에서 만난 정부 프레드 케이슬리를 살해하고 벨마와 여죄수들이 수용되어 있는 쿡 카운티 교도소에 보내진다.
시카고 최고의 변호사 빌리 플린, 빌리는‘내게 소중한 것은 사랑뿐(All I Care About is Love) 이라며 노래하지만 그의 실질적 관심은 돈뿐이다. 빌리는 록시의 사건을 맡기로 하고 그녀의 이야기를 완전히 새롭게 각색하여, 록시의 석방을 위해 일한다. 록시의 기자회견은 각색 된 진실(We Both Reached For The Gun)을 읊는 복화술사 빌리와 입만 벙긋 거리는 꼭두각시 록시로 표현된다. 약속대로 빌리는 록시의 석방을 성취시키지만 판결이 내려지기 바로 직전에, 더욱 흥미로운 범죄의 등장으로 모든 언론의 관심이 록시에게서 멀어지고 마침내 그녀의 유명세는 막을 내린다. 혼자 버려진 록시, 하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용기를 북돋으며 삶의 즐거움을 격찬한다. 록시는 벨마와 함께 팀을 이루어(Nowadays) 열정적인 춤을 선보이고(Hot Honey Pag) 전 출연진이 모두 피날레에 동참한다.
뮤지컬‘시카고’는 인간의 부정부패와 부조리한 삶을 통한 인간이 어디까지 이율배반적일 수 있으며, 모순적일 수 있는지를, 너무나도 잘 표현한 작품이다.
1부에서 중요한 세 장면
첫 번째 장면은 쿡 카운티에 수감 된 벨마를 포함한 6명의 여 죄수의 퍼포먼스 장면이다. 이들 퍼포먼스의 핵심은 바로,‘무죄’라는 것이다. 뮤지컬‘시카고’가 말하는‘무죄’의 의미는 과연, 어떤 것일까? 사실, 그녀들의 죄는 완벽한 유죄이다. 그러나, 심정적으로는‘무죄’이다. 그것은 바로, 1920년대 무질서한 시카고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일들 가운데 그들 여섯 명은 최소한 옳고 그름의 문제에서는 옳음을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방법론에 있어서는 그들은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구분이 중요한가? 인간은 바로, 이 옳고 그름과 방법론의 문제에서 늘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옳음을 이야기 한다고 옮은 사람이 아니라, 옮게 사는 사람이 옳은 사람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자신이 말한대로 살 수 있는 온전한 존재는 존재치 않는다는 사실이다. 바로, 여기에 인간의 모순과 이율배반적 모습이 들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두 번째 장면은 록시의 기자회견 장면이다. 각색 된 진실(We Both Reached For The Gun)을 읊는 복화술사 빌리와 입만 벙긋 거리는 꼭두각시 록시로 표현되는 이 장면은 또 다른 인간의 이율배반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뮤지컬‘시카고’를 통해 록시의 내면적 갈등을 알 수는 없으나, 인간은 누구나 진실을 말해야 하는 나 자신과, 어쩔 수 없이, 내가 살아 남기 위해, 거짓을 말해야 하는 상황속에서 이율배반적인 갈등을 하게 된다. 결국, 록시는 현실의 살아남음의 문제 앞에 완벽한 꼭두각시 인형으로 전락하여 인간 이율배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세 번째 장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판마저도 자신이 맡았으면 승리했을 것이라는 시카고 최고의 변호사 빌리 플린, 그의 주제가는‘내게 소중한 것은 사랑뿐’(All I Care About is Love)이다. 그러나 그의 실질적 관심은 돈과 이익뿐이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 내 삶 가운데서 이곳 저곳에서 보게 된다. 우리가 어떤 대화를 할 때 그런 적은 없는가?‘돈은 사실상 중요치 않아’이렇게 이야기 하는 순간, 그 사람 내면에는 이미, 돈이 가장 중요하다는 내면을 표출한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무언가 모를 명분과 고귀함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이면의 모습은 그렇지 않을 때가 너무나 많다.
2부의 중요한 주제 세 가지
첫 번째 주제는 바로, 황색과 가식 그리고 자기주목
벨마가 재판장에 서기 위해 큐빅이 박힌 구두를 신고 노래하는 장면은 유죄와 무죄를 선고내리는 신성한 재판장에서마저 주목 받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잘 표출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주목 받는 삶을 한 번이라고 상상해 보았을 것이다. 그 주목 받고 싶은 마음을 벨마를 통해 일반화 시키고 있으며, 그 주목 받고 싶은 인간의 마음은 이 사회를 이끌어 가는 힘이 되기도 한다. 2부에서 중간 중간 계속해서 등장하는 기자 회견의 장면은 바로, 이 사회가 황색적이며, 자극적인 이슈로 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것을 우리에게 다시금 상기 시킨다. 벨마의 자기 주목, 록시의 자기 주목, 그러나 화려한 이면 뒤에 숨겨져 있는 인간의 궁극적 고독과 외로움, 무언가 모를 분주함이 사라질 때 찾아오는 공허함을 뮤지컬 시카고는 그리고 있다. 사회 구성원들에게 황색적이고, 자극적인 기사로, 진정 중요한 이슈를 가리는 방법의 정치적인 방법 등, SNS를 통해 한 사람이 자살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21세기 오늘이나, 1920년 대 시카고나 크게 다를 것은 없다. 이러한 황색적이고, 자극적인 분위기를 뮤지컬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어지고, 그 상징은 바로, 배우들이 입은 속옷 같은 복장으로 대변된다.
과 수시로 등장하는 기자회견 장면이다.
두 번째 주제는 이 사회는 과연, 어떻게 돌아가는가? (system/matrix)
변호사 빌리 플린의 대사 중 다음과 같은 대사가 있다.‘이것은 쇼 비즈니스야, 이건 마치 서커스와 같아’록시는 빌리 플린의 각본대로 법정에서 연기를 하고, 정당방위를 통해 무죄 판결을 받는 시나리오이다. 이 사회는 이미, 쓰여 져 있는 각본과, 체계화 되어 있는 system과 matrix가 존재하고 있다. 그 틀에 우리를 맞추어 살아 갈 때 이 사회는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유지 되는 것 같아 보인다. 뮤지컬‘시카고’는 이 사회를 유지하는 두 가지 방법을 바로,‘품위’라는 단어로, 정의 내리고 있다. 1920년 대 강도와 강간이 들 끊는 시카고는 가정이 붕괴되고, 혼란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은 바로, 품위라는 것이다. 그러나 시카고에서 말하는 품위는 웬지 모르게 나에게 고결하게 느껴지기 보다는 가식이라는 단어와 가깝게 느껴지는 인상을 받게 된다. 이 사회를 지탱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마지노선, 품위, 정치가로써의 품위, 가정의 가장으로써의 품위, 직장 상사로써의 품위, 목회자로써의 품위, 그 외면을 두르고 있는 품위는 품위를 위한 품위로 다가온다. 그래서 그 품위위에 진정성은 존재하지 않는듯하다.
세 번째 주제는 인간의 궁극과 이율배반
2부에서 변호사 빌리 플린과 록시가 싸우는 장면은 바로, 자기 주목과 자기 드러냄의 왜곡 된 표현의 결정체를 보여준다. 이득으로 얽혀 있는 빌리 플린과 록시는 자기 드러냄이라는 욕망을 참지 못하고, 결국, 외적 분쟁과 싸움으로 이어진다. 쉽게 말해, 네가 잘났냐? 내가 잘났냐?의 문제로,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둘은 결별하게 된다. 그러나 그 결별 장면과 동시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미국에 살면서도 영어를 구사하지 못하며, 무죄만을 외치는 그 한 여인은 쿡 카운티에서 지난 48년 동안 교수형이 처해지지 않은 역사를 깨고, 그 여인은 교수형에 처하게 된다. 록시는 죽음이라는 궁극적 두려움 앞에, 다시, 현실의 비루한 삶을 살아 내기 위해서, 비굴하지만, 빌리 플린에게 애원하며, 그들의 이해관계는 다시 시작 된다. 그리고 짜여진 각본대로, 록시는 재판장에서, 무죄를 선고 받는다. 그런데 그 무죄를 선고 받는 장면 바로 직전에 록시의 사건보다, 더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는 사건이 터지게 되고, 결국 록시의 무죄 선고를 스포트라이트에서 멀어지게 된다. 1부에서 자신의 살인 사건을 다룬 기사를 보고도 자신이 신문에 등장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록시는 궁극적인 외로움과 왜곡 된 자기 주목에서 자신의 왜곡 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내 내면을 잘 그려주는 인물로 묘사된다. 이러한 궁극성을 잃은 정체성은 육체적 자유를 만끽하고도, 참 된 영혼의 자유는 누리지 못하는 인간의 불쌍한 실존을 그려주고 있다. 그리고, 빌리 플린은 록시, 당신의 석방은 신의 은총이요. 라는 말로, 그를 위로하며, 사라진다. 이것은 마치, 오늘의 신자들을 고발하는 내용이 아닌가? 싶다. 신앙도 하나의 품위가 되어 버린, 우리를 고발하는 장면 같아, 매우 씁쓸했다. 자기 주관과 자기 중심적으로 신의 은총이라고 말하는 우리네 삶의 이율배반적인 장면을 고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배경음악은 다름 아닌, 찬송가 494장의 ‘만세 반석 열리니’였다. 3절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과연, 우리가 바라는‘의’는 무엇이고, 우리의 어떤 모습까지, 용서가 되는가? 주중 죄인 된 삶을 살고, 주일 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연, 의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많은 생각과 고뇌를 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마지막 벨마와 록시가 합동으로 공연을 하며, 주목 받는 장면은 정말, 깊은 우리 심령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육체적 석방 앞에서도 진정한 영혼의 해방을 경험하지 못하는 록시는 이제, 그 거짓의 삶을 마치 진실 된 삶으로 착각하여, 자신의 뇌에 거짓을 완벽히 덧입혀, 진실과 맞바꿔치기 한다. 그리고, 간증형식으로, 벨마와 함께 무대에 서게 된다. 지난 자신의 억울한 삶속에서 무죄 선고를 받기까지 그 감동적인 거짓이야기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또 다른 자기 주목과 자기 성취 그리고 보람을 느끼는 자신과 타인을 완벽히 속이려는 삶을 살아간다. 이 장면을 통해 과연, 인간의 이율배반의 마지막은 어디인지 다시금 되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관객인 우리 또한 마찬가지이다. 관객들은 오직, 황색적인 감동 이야기에만 매몰되어, 그곳에서 싸구려 눈물을 흘려서라도 무언가 모를 카타르시스를 느끼고자 한다. 사람들은 진실의 여부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다. 거짓이 되었든, 진실이 되었든, 그 이야기가 감동을 주는가? 그렇지 않은가?에만 매몰 되어 있는 우리들을 뮤지컬‘시카고’는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다. 무엇이 되었든 나의 공허함과 갈급함을 채우면 된다는 또 다른 인간들의 이율배반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자신의 몸속에 갇혀 살아간다. 이 이야기는 인간은 누구나 육신의 몸속에 갇혀 있는 한 이율배반적이며, 모순 덩어리라는 의미이다. 뮤지컬‘시카고’는 사회적 현상과 각종 부조리를 통해, 인간의 궁극적 자기모순과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낱낱이 보도하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이 작품을 꼭 한 번 직접 관람하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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