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 칼럼] 가라앉지 않으려면 헤엄쳐라 Sink or Swim (4): 코스모스頌 Ode to the Cosmos

이태상

 

어쩌면 이것 또한 그동안 내가 인생이란 종이에 삶이란 펜으로 사랑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을 잉크 삼아 써온 아니 우리 모두 너와 나의 자서전적自敍傳的 낙서落書라고 할 수 있으리라.

 

타고난 태곳적太古的 향수鄕愁에 젖어 정처 없이 떠돌아 방황 彷徨하던 시절 이미 어린 나이에 사랑의 순례자巡禮者가 된 나는 독선獨善과 위선僞善과 아집我執으로 화석화化石化된 어른들의 세계가 보기 싫어 순수純粹한 사랑으로 코스모스 속에 새로 태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었다.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한 그 아무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내 인생이 저무는 때에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바람 한 점에도 코스모스 출렁이는 바다 됨은 다 늙어 깨우침에 아직도 미련未練의 노래 남아서일까.

 

청소년 시절 셰익스피어의 오셀로(Othello, 1565)’를 읽다가 그 작품 속의 주인공 오셀로가 악인 이아고에게 속아 넘어가 선량하고 정숙한 아내 데스데모나를 의심, 증오와 질투심에 불타 그녀를 목 졸라 죽이면서 그가 그녀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란 말에 나는 펄쩍 뛰었다.

 

사랑이라고?

사랑은 무슨 사랑?

사랑과 정반대를 한 것이지.

사랑이란 말 자체를 모독하고

사랑이란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인간의 진실을

더할 수 없이 모욕하고 모독한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격분해서 씩씩거렸다. (아직도 좀 그렇지만) 오셀로가 진정으로 그의 부인 데스데모나를 사랑했었다면 첫째로 그가 경솔하게 부인을 의심한 것부터 잘못이다.

 

둘째로 그가 진정으로 부인을 사랑했었다면 설혹 그녀가 정부와 정을 통하고 있는 현장을 자기가 직접 제 눈으로 목격했다 하더라도 그녀의 행복을 위해 자기가 물러나 부인을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에게 보내 줄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셋째로 그가 자신의 경솔했던 잘못을 깨닫고 자살이란 간편한 방법으로 쉽게 책임 회피, 현실 도피를 하고 말았는데, 그럴 것이 아니라 부인이 못다 살고 간 몫까지 합해서 몸은 죽고 없는 혼이라 도 함께, 그야말로 한 몸, 한마음, 한 영혼으로 한데 뭉쳐 아무리 괴롭더라도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끝까지 살았어야 했으리라. 이렇게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또 언젠가 미국 음악 영화 로즈 마리(Rose Marie,1936)’를 보다 가 그 끝 장면에 나는 무릎을 치면서 그 스토리의 결말이 좋아 쾌재(快哉)를 불렀었다. 사람은 누구나 각자 제 속에 지니고 있는 것만을 밖에서 감지할 수 있듯이 우리 모두 각자가 저마다 거울처럼 바깥세상에서 저 자신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백인 기마대가 어느 아메리카 인디언 부락을 습격,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죄다 학살했는데, 어떻게 한 어린 소녀가 살아남은 것을 이 기마대 상사가 거둬 자식처럼 키웠다. 그러나 이 아이가 커서 아름다운 처녀가 되자 상사는 이 처녀를 마음속으로 사랑하게 된다. 이 인디언 처녀는 상사 아저씨를 생명의 은인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존경하면서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상사 아저씨가 원하면 그와 결혼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러던 어느 날 처녀는 뜻밖에 어떤 젊은 사냥꾼을 만나 둘이 서로 사랑하게 된다. 상사 아저씨를 저버리고 이 사냥꾼을 따라나설 수 없어 고민하는 처녀를 상사 아저씨가 제일 좋은 말에 올려 태우고 말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쳐서 처녀를 기다리고 있는 사냥꾼에게로 보내준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내 나름대로 추리를 해보았었다. 만약 기마대 상사 아저씨가 제 욕심만을 채우기 위해 억지로 인디언 아가씨를 잡아두고 결혼까지 했었다면 결국 아가씨도 사냥꾼도 불행하게 만들고, 불행한 아가씨와 사는 자기 자신도 결코 행복할 수가 없었을 텐데, 자기가 사랑하는 아가씨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아가씨가 사랑하는 남자에게 그녀를 보내 줌으로써 한 쌍의 젊은이들 이 행복했을 것은 물론이고, 자기가 사랑한 아가씨가 행복하리라 는 확신에서 또 그녀의 행복을 계속 빌어 주는 마음으로 제 가슴이 늘 아리고 저리도록 흐뭇 짜릿하게 그 자신 또한 행복하였으리라고.

 

청소년 시절 내가 보게 된 또 하나의 미국 고전 영화 서부활극 셰인 Shane (1953)’이 나는 너무너무 좋았다. 총잡이 셰인이 총잡이 생활을 청산하고 길을 가다가 머물게 된 어느 시골 농촌 마을에서 선량한 그 마을 사람들이 일단一團의 악당惡黨으로부터 온갖 고통과 피해를 입고 있는 것을 보다 못해 안 잡겠다던 총을 다시 잡아 혼자서 여러 명의 총잡이 악당을 통쾌하게 해치우고 떠나가는 스토리였다.

 

어느 농가의 어린애와 잠시지만 친하게 지내면서 그 아이의 엄마, 농부의 아내가 보내는 사모思慕의 정어린 시선을 뒤로하고 그 농부 가정의 행복을 빌며 냉정히 떠나가는 끝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아이가 뒤쫓아가며 셰인, 셰인부르는 소리가 먼 산울림으로 메아리치고

 

그 영화 스토리에서와 같은 환경과 입장에 처했었다면 나도 바로 그 주인공 셰인 같이 행동했으리라고 공명, 공감했었다. 하기야 그 당시 그 영화를 본 친구들과 가족까지도 (젊었을 때) 내 외모나 성품이 셰인 역을 맡은 배우 알란 랏드Alan Ladd (1913-1964) 같다 했었으니까. 하하...

 

어쩜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와서 돌이켜 봐도, 내가 살아온 삶이 아닌 게 아니라 셰인과 좀 비슷한 데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군 복무 시절이나 직장생활에서도 셰인처럼 나도 조용하면서도 당차게 일조 유사시엔 마치 일기당천一騎當千하듯 악당을 멋있게 해치웠고, ‘억강부약抑强扶弱했지 자전거 타듯강자나 윗사람에게는 고개 깊이 숙여 , 절절 굽신거리면서 아랫사람 약자를 짓밟고 못살게 굴지는 않았으니까 말이다.

 

우리 생각 좀 해보면 세상에 그 어느 누구도 남을 짓밟고 얼마나 높이 올라설 수 있는지, 또 다른 사람의 불행 위에 얼마나 마음 편안한 행복의 꽃을 피울 수 있는지 정말 의심스럽지 않은가. 적극적으로 상대방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으면 최선이겠지만 그럴 수 없을 때는 최소한 상대방을 괴롭혀 불행하게 하지는 말아야지. 이것이 차선지책(次善之策)이 아니겠는가.

 

얼마 전 언론에 보도된 실화가 있다. 미국에 이민 온 인도 가정의 이야기다. 딸이 인도의 전통적 신분제도인 카스트가 다른 청년을 사랑하게 되어 집을 나가 그 청년과 살다가 이 사실이 친지들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자 아버지는 딸을 찾아내 살해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가족의 수치羞恥라는 거였다.

 

얼마 전부터 전 세계적으로 미투 운동(The Me Too move-ment)’이 벌어지고 있는 오늘날에도 인도, 파기스탄 등 중동지역에서는 아직까지도 명예살인honor killing’이 자행되고 있다지 않은가. 아내나 딸 또는 누이가 성폭행을 당하면 가족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피해자를 다른 사람도 아닌 가족이 살해한다니 말이 될 법이나 한 일인가. 피해자를 보호해주지 못한 가족이 자책하고 속죄할 일이지 어찌 피해자를 죽여버릴 수가 있을까.

 

내가 초등학교 시절 한 급우가 연필 한 자루 훔쳤다는 의심을 받자 자기의 결백을 증명하겠다고 자살한 일이 있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도적맞았다는 그 연필이 연필통에 있었는데 책상 서랍에 있던 것이 없어졌다고 소동이 일어났던 것이었다.

 

옛날 악법도 법이라며 독약을 먹고 자살한 소크라테스를 비롯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어 왔지만, 자살이란 최선最善은 물론 차선次善은 커녕 최악最惡의 해법解法이 아닐까?

 

전태일 열사처럼 분신자살할 수밖에 없을 경우도 있겠지만 이런 경우에라도 죽기보다는 살아서 시지프스처럼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마지막 한 방울의 피와 땀과 눈물을 쏟아가며 운명의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다 보면 이 피와 땀과 눈물이 아롱아롱 아지랑이처럼 하늘로 피어올라 깜깜하던 카오스 같은 하늘에 아름다운 코스모스 무지개로 피어나는 것이리라.

 

동트기 직전이 가장 어둡고 하늘이 깜깜할수록 하늘에 별이 그 더욱 빛날 수 있으며 우리가 날리는 연도 바람을 탈 때보다 거스를 때 가장 높이 뜨지 않던가. 마찬가지로 우리가 자살을 거꾸로 읽으면 살자가 되듯이 사노라면 절대로 풀릴 수 없을 것 같은 문제도 스스로 저절로 풀리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 같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When you don’t know what to do, just wait and see. More often than not, things sort themselves out.

 

내가 직접 겪은 예를 하나 들어보리라. 대학 진학 때 어떤 전공과목을 선택할까 생각하다가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대학 과정은 하나의 교양과정에 불과할 것이다. 앞으로 일생을 살아가는데 학문적인 기반, 경제적인 기반, 사회적인 기반, 다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정신적인 기반을 닦는 것이 급선무라고.

 

인생은 망망대해茫茫大海에 떠도는 일엽편주一葉片舟 같다지만 그런대로 내 나름의 방향감각을 갖고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항해해 보기 위해서는 나침반 같은 인생관을 무엇보다 먼저 확립해 봐야겠다고. 그래서 선택한 과목이 종교철학이었다.

 

대학 시절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의 영구집권을 반대, 돈키호테처럼 일인거사一人擧事를 도모했다가 수포가 된 데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첫인상이 코스모스 같았던 아가씨와의 첫사랑에 실연失戀당해 나는 동해에 투신까지 했었다.

 

매년 가을이 되면 한국에는 가는 곳마다 길가에 깨끗하고 고운 코스모스가 하늘하늘 피어 길가는 나그네의 향수를 달래준다. 이때면 예외 없이 나는 가슴앓이를 하게 된다. 아물어가던 가슴 속 깊은 상처가 도져 다시 한번 코스모스 상사병相思病을 앓게 된다.

 

1910829일 한일 합병 조약에 의해 한국의 통치권을 일본에 빼앗긴 우리나라 국치國恥의 한일합방韓日合邦 이후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군에 가담하셨다가 만주로 떠나신 뒤 1945815일 해방이 된 다음에도 아무 소식 없는 외할아버지와 외삼촌들 이야기를 듣고 자라서였을까, 어려서부터 나는 내가 좀 더 일찍 태어났더라면 나도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의사 못지않은 애국 투사가 되었을 텐데 하면서 어린 두 주먹을 꼭 쥐고 작은 가슴을 쳤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4.19세대가 되었다.

 

대학 다닐 때 선거 운동을 좀 한 것이 주목되었었는지 오래전에 고인故人이 되셨지만 당시 야당인 민주당의 중진급 국회의원이시던 모 인사께서 나보고 자기 비서로 일해 달라는 청을 사절하고 독불장군처럼 나는 엉뚱한 일을 남모르게 혼자 추진하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도 앞으로 우리 세계는 정치, 경제, 문화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국제무대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외국어를 아는 것이 현대인의 필수적인 상식常識에 속할 것으로 판단하고, 나는 중-고등학교 때부터 영어는 물론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까지 배웠고, 지금은 거의 다 잊어버렸지만, 대학에서는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러시아어, 라틴어, 아랍어까지 익혔다.

 

그래서 대학생 시절 나는 영--프랑스-스페인어를 다른 대학생들과 군장성 및 회사 사장님들에게 개인교수도 했다. 때는 자유당 말기, 이승만 대통령이 독선적인 자아도취自我陶醉에 빠져 부정선거를 통해 영구집권을 꾀하고 있었다. 초대나 2대만 하고 물러나셨다면 미국의 조지 워싱턴처럼 대한민국의 국부가 되실 텐데 자신의 남은 여생을 그르치고 한국 역사의 바람직한 흐름을 망쳐놓고 계신 것이 아닌가. 젊은 혈기에 나는 분통이 터졌다.

 

미숙하고 설익은 나이 탓이었겠지만 남자로 태어나서 갖지 못할 직업이 세 가지가 있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첫째는 비서직, 둘째는 대변인직, 셋째는 대서나 대필업으로 얼마나 못났으면 제 일을 못 하고 남의 심부름이나 하고, 제 말을 못 하고 남의 말이나 옮기며, 제 글을 못 쓰고 남의 글이나 대신 써주랴 싶었다.

 

그러니 국회의원이라면 몰라도 국회의원 비서직은 직업으로 여겨지지도 않았을뿐더러 이왕이면 대통령 비서 노릇을 해보리라. 그것도 대통령 비서직이 탐나서가 아니고, ‘호랑이를 잡자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것이 상책上策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렇다고 내가 그 누구를 암살暗殺이라도 하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세간世間에 나도는 얘기로는 이 대통령께서 간신배, 모리배, 아첨배 무리들의 인의 장막에 가려 민의民意와 세정世情을 제대로 살피시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니 내가 측근자가 되어 사심私心/邪心없이 직언直言을 해보리라. 그래서 지금은 청와대라 하지만 그때는 경무대로 불리던 대통령 비서실의 의전비서가 되기로 마음먹고 당시 유력한 고위층 모모 인사의 천거 薦擧까지 받았다.

 

한편 만일 계획대로 나의 간언諫言이 주효奏效하지 않을 경우에 대비해 나는 학생운동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 종로에 있는 고려당 빵집에 들렸다가 우연히 나는 한 아가씨와 눈이 마주쳤다. 이 아가씨는 너무도 코스모스처럼 청초하고 아름다웠다. 뒤를 밟아 신촌까지 따라가서 인사를 나누고 그 후로 우리는 몇 번 만나 식사도 하고 영화도 보고 쎄시봉같은 음악 감상실과 은하수銀河水같은 음악 다방茶房에도 갔었다.

 

하루는 이 코스모스 아가씨와 서울에 있든 대한 극장에 영화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을 보러 갔었다. 이층 로비에서 다음 회 상영시간을 기다리며 서성거리던 중 아가씨가 서슴없이 화장실에 안 가겠느냐고 물었다. 별로 갈 생각이 없었지만 아가씨가 무안스러워할까 봐 우리는 화장실로 향했다.

 

신사-숙녀 화장실 입구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마렵지도 않은 오줌을 누는 시늉만 하면서 잠시 소변기 앞에 서 있자니 지금 몇 미터 공간을 단축시키면 아가씨와 나 사이에 거리가 없어져 코스모스 아가씨속에 내가 있겠구나 하면서 축지법縮地法이 아닌 축공법縮空法을 나는 창안創案해 냈다.

 

그 후로 나는 결코 외롭지 않았다. 언제 어디에서나 그 어느 아무 누구하고도 아주 가깝게 느낄 수 있게 되었으니까. 우주 공간을 한 점/으로 압축壓縮시키면 세상 모든 사람들과의 거리가 없어지고 아무하고라도 일심동체一心同體가 될 수 있지 않은가. 이 얼마나 기적奇蹟 중의 기적, 요술妖術 중의 요술, 육갑六甲 중의 육갑이 아니랴!

 

아가씨는 경남여고를 나와 이화여대 약학과에 다니고 있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1959년 겨울 방학으로 부산에 있는 집에 내려가면서 아가씨가 내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단테의 신곡 神曲Divine Comedy’ 원서 한 권을 나는 받았다.

 

내가 추진하는 일이 성사되는 대로 부산으로 내려가 아가씨의 부모님을 찾아뵙겠다고, 만일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개학해서 아가씨가 상경한 후 다음 해 1960214일 성발렌타인 축일St. Valentine’s Day에 서울 종로에 있는 호수 그릴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진 며칠 후 나는 증발蒸發되고 말았다.

 

갖은 고초苦楚를 겪고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은신隱身하면서 나는 나의 코스모스 아가씨에게 편지를 썼다. 약속된 시간과 장소에서 만나볼 수 없게 되었지만 나를 꼭 기다려 달라는 간곡한 편지를 그냥 종이에다 펜과 잉크로 쓰기는 성의가 부족한 것 같고 성에 안 차 나는 주사기로 피를 한 대접 뽑아 붓으로 창호지에다 혈서血書를 써 소포로 부쳤다.

 

이 혈서를 받아보고 질겁을 했는지 코스모스 아가씨에게서 자기를 잊어달라는 짤막한 답장이 왔다. 목숨을 걸고 무모하게 꾀하던 일이 틀어져 나락奈落/那落을 헤매면서도 코스모스 아가씨에 대한 사랑으로 간신히 버티어 오던 나에게 이 마지막 희망의 불빛이 꺼지자 너무도 깜깜 절벽 절망切望/絶望뿐이었다.

 

더 이상 살아 볼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어려서부터 미리 짜 놓았던 마지막 코스를 밟기로 나는 결심을 했다. 마지막 코스란 내가 할 수 있는 나의 최선을 다한 결과, 최악의 경우에 직면해서 내가 취할 수밖에 없는 최후 조치였다.

 

시험이고, 사업이고, 연애이고 간에 무슨 일이든 시작할 때 미지수 未知數인 결과에 전전긍긍戰戰兢兢하다 보면 불안감과 초조한 마음으로 말미암아 사람 꼴이 안 되는 것 같아, 물론 최선의 결과를 희망하고 기대하며 어떤 일이든 시작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처음부터 최악의 경우까지 각오해 놓으면 밑져 봤자 본전격으로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는 최악의 사태보다 더 나쁠 수는 없지 않겠나 하는 발상에서 나온 조치였다.

 

사사건건 일마다 최악의 경우를 각오하는 것보다는 몰아서 한꺼번에 해두는 것이 더 유유자적悠悠自適하듯 마음의 여유가 생길 것 같아 나는 최악 중의 최악을 각오했었다. 하다 하다 안 되면 자폭 自爆하면 되지 않겠나? 살다 살다 못 살겠으면 죽어버리면 되겠지만, 그것으로도 충분치 않다고 할 때, 가령 내세來世가 있다고 가정해서 지옥 하고도 그 지옥 맨 밑바닥까지 갈 각오만 되어있으면 세상에 두려 울 것이 없었다.

 

그렇다 치고, 그럼, ‘최악 중의 최악의 경우 어떻게 자살을 할 것인가? 그 구체적인 방법까지 나는 강구講究해 두었었다. 배라도 한 척 구 할 수 있으면 인생 자체에 비유되는 망망대해로 노를 저어 가는 데까지 가다 죽으리라. 그렇지도 못하다면 그냥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쳐 가는 데까지 가다 죽으리라.

 

이것이 내가 선택한 나의 죽는 방법인 동시에 나의 사는 방법이었다.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나의 최선을 다 해보겠다는 나의 결심과 굳은 의지였다. 이렇게 해서 마치 오래 비장했던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를 뽑듯....

 

미치고 못난 놈이라 욕하셔도

바다 코스모스의 품에 뛰어 들겠습니다

 

이런 유서遺書코스모스 아가씨에게 띄우고 나는 동해바다에 투신했다. 정말 인명은 재천이었을까. 구사일생이 아닌 구십구사 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척추 디스크 수술을 받으며 서울에 있는 메디컬 센터에 내가 입원해 있는 동안 4.19가 났다.

 

하루는 신문에서 코스모스라고 한 4.19 의연금義捐金 기부자가 명단에 있는 것을 보고 틀림없이 코스모스 아가씨가 내가 4.19 운동에 관여 동참했다가 희생된 것으로 알고 나를 생각하는 추모 追慕의 정이라고 단정斷定, 나는 감읍感泣했다.

 

이 순간 죽어도 한이 없을 만큼 나는 행복했다. 이 행복감을 만끽 滿喫하면서 나는 영원히 잠들고 싶었다. 그래서 한 번 수술 받고 괜찮은 몸을 꾀병을 앓아 두 번, 세 번 수술을 받았다. 수술을 받다가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제일 좋겠고, 다시 깨어난다 하더라도 코스모스의 추억만으로 나는 남은 여생,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자면 내가 차라리 성불구자性不具者가 되는 것이 편리하지 않겠나 하는 속셈에서였다. 척추 수술을 받으면 성불구가 된다는 말을 나는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자나 깨나 코스모스를 생각하면서 일 년 가까이 입원해 있던 어느 날, 다시 신문에서 이대 졸업반 학생들에게 앙케이트로 설문 조사한 여학생들의 결혼관에 대한 기사를 나는 읽게 되었다. 나의 코스모스도 졸업반이었다. 그 가운데 결혼하지 않겠다는 몇몇 학생의 말이 내 눈에 띄었다. 또 그중에서 남자의 생애가 너무도 모질고 비참한 것 같아서

 

이 말이 내 가슴을 무섭게 쳤다. 이렇게 내가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죽은 줄만 알고 나를 못 잊어 결혼도 안 하겠다고 하는구나. 내가 참으로 못 할 짓을 하고 말았구나. 한시라도 빨리 이 끔찍한 고통에서 코스모스를 해방시켜야겠다고 생각하니 나는 또 자신이 없었다. 혹시라도 내가 이미 성불구자가 되지는 않았을까? 그렇다면 코스모스앞에 나타날 수 없지. 성불구가 아니라도 아빠 구실, 아빠 노릇을 하는 아빠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심히 미심 未審쩍었다.

 

그래서 나의 정충精蟲 정자精子 검사까지 해보고 나서야 안심하고 나는 코스모스에게 편지를 썼다. 1961214호수 그릴에서 만나자고. 이날은 집안 어른들도 그 자리에 나오시도록 한 터라 학교로 보낸 나의 편지를 코스모스가 받아보았는지 확인하려고 이화여대梨花女大로 찾아가 보았더니 편지를 수신자 본인이 찾아가지도 않은 상태였다. 나는 그 편지를 되찾아 코스모스가 서울에서 거처하는 주소를 물어 찾아갔다.

 

그야말로 착각錯覺은 자유, 망상妄想은 바다라고 만나보니 내가 그동안 너무도 크게 착각, 얼토당토않게 터무니없는 망상, 망념 妄念에 사로잡혀 온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코스모스는 나와 헤어진 후 교제하는 다른 남자가 있다고 했다. 진심으로 행복을 빌어주고 돌아오는 나는 허탈감과 공허감에 빠져 눈앞이 아찔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땅이 꺼졌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세상에 (죽었다가) 새로 태어난 것 처럼 말할 수 없는 희열喜悅과 희망希望에 차 코스모스와 함께 할 한없이 보람되고 복된 아름다운 우리의 앞날을 꿈꾸었었는데

 

스웨덴의 정치가로 국내 정치 무대 진출이 여의치 않자 국제 정치 무대에서 활약 1961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전 유엔사무총장 닥 함마슐트(Dag Hammarskjold 1905-1961)처럼 나도 외교관이 되어 우리나라의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자주독립과 우리 민족의 숙원인 평화적인 남북통일을 위해 힘써 보리라는 포부와 야심으로 전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고등고시용 법률책들을 한 보따리 사놓고 몸도 추스르고 요양할 겸 설악산에 있는 어느 절에 가서 행정고시 行政高試 준비를 하기로 했었는데

 

나는 자포자기自暴自棄끝에 코르셋을 한 몸으로 자원입대, 의병 면제依病免除된 병역의무兵役義務를 일부러 일삼아 굳이 사서군대 생활을 했다. (고시 공부하려던 책들은 다 불태워 버리고.)

 

6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돌이켜 보면 나의 첫사랑이 이루어졌더라면 평생토록 코스모스를 그리워하면서 키워온 코스미안 사상과 철학도 싹트는 일이 없었으리라. 그러니 이래도 저래도, 얻어도 잃어도, 다 좋고 괜찮다고 해야 하리라. 가는 길이 오는 길 되고, 오는 길이 가는 길 되며, 저 바다의 밀물과 썰물처럼 말이어라.

 

소년 시절부터 읊기 시작한 또 하나의 동시童詩 코스모스는 내가 지었다기보다 자연스럽게 스스로 쓰여진 나의 아니 우리 모두의 자서시自敍詩가 되리라.

 

코스모스

 

소년은 코스모스가 좋았다.

이유도 없이 그저 좋았다.

소녀의 순정을 뜻하는

꽃인 줄 알게 되면서

청년은 코스모스를

사랑하게 되었다.

 

철이 들면서 나그네는

코스미안의 길을 떠났다.

카오스 같은 세상에서

아름다운 우주

코스모스를 찾아서

 

그리움에 지치지 않는 노인은

무심히 뒤를 돌아보고

완이일소 莞爾一笑

빙그레 한번 웃게 되리라.

걸어온 발자욱마다

무수히 피어난

코스모스바다를

발견하고.

 

무지개를 좇는

파랑새의 애절한 꿈은

정녕 폭풍우 휘몰아치는

저 먹구름장 너머 있으리라.

 

사랑의 무지개를 올라탄

코스미안 한없이 황홀하리라.

하늘하늘 하늘에서 출렁이는

코스모스바다 위로 날면서.

 

Ode to the Cosmos

 

When I was fourteen years old, I left home and went on a journey. People said I became a vagabond at an early age. One summer night, l wrote a poem, or rather this very short memoir of us all must have been written by itself.

 

Cosmos

 

When I was a boy,

I liked the cosmos

Cozy and coy

Without rhyme or reason to toss.

 

Later on as a young man

I fell in love with the cosmos,

Conscious of the significance

Of this flower for me sure,

The symbol of a girl’ love pure.

 

As I cut my wisdom teeth,

I took the Cosmian way

Traveling the world far and near

In my pursuit of the Cosmos in a chaotic world.

 

Upon looking back one day,

Forever longing, forever young,

Never aging and never exhausted

By yearning for the cosmos,

I’d have found unawares numerous cosmos

That had blossomed all along the road

That I had walked.

 

A dreamland of the bluebird

Looking for a rainbow,

Where could it be?

Over and beyond the stormy cloud

That’s where it could be,

Right there arainbow of love!

 

Come autumn, wherever you go in the countryside of Korea, the pure and pretty cosmos, shyly swaying in the breeze, catches the wanderer’s eye all along the journey. At times like this, you suffer from an old heartache.

 

As a constant stream of humanity flowed by, I became a young man.

 

One day in a bakery cafe, I was instantly captivated by a girl so pure and pretty. It was love at first sight. If she were a flower, what flower would she be? There was a saying that among all the creations of God, the cosmos was the first and the chrysanthemum was the last.

 

While I was in a daze, she was leaving. I hesitated before following her. She became aware of being followed from downtown Jongno to Sinchon on the outskirts of town.

 

“Do you have any business with me?” She asked. She had a clear voice.

 

“Please let me introduce myself. I’m a new philosophy-religion graduate of Seoul National University. I want to make your acquaintance, if I may. Do you mind?”

 

She blushed scarlet. I was delighted and decided to call her my Cosmos.

 

I started dating my Cosmos. We frequented music cafes like C’est Si Bon, and The Milky Way, in downtown Seoul. One day we went to see a film, The Brothers Karamazov. Waiting in the second-floor lobby for the next show-time, she asked, “Do you want to go to the bathroom?” I didn’t feel like going, but I went anyway.

 

The entrances to the men’s and women’s bathrooms were side by side. I stood for a moment in front of the urinal and a thought crossed my mind that I and my Cosmos were not far apart with only a wall between us. I realized if the distance was shortened by just a few feet, I could be in her.

 

At the very moment I experienced the contraction of the space. Thereafter, I never felt lonesome again. Anytime, anywhere, I could feel close to anybody. If the whole universe were compressed into a single dot, one could be united with all.

 

In the meanwhile, a powerful opposition politician asked me to become his secretary. My involvement with the student movement opposing the corrupt and dictatorial government must have caught his attention. I declined the offer because I had other plans.

 

In the future, be it politics, economics or culture, in all walks of life, I thought, it was going to be global, and therefore learning foreign languages was essential. Since middle and high school I’d been learning English, Japanese, Chinese, German, French and Spanish. And in college I studied Latin, Greek, Hebrew, Russian, and Arabic. I became fluent enough in English, German, French and Spanish to tutor fellow students, businessmen and military generals.

 

Being a greenhorn at that age, I decided three jobs were unworthy of a man: secretary, spokesperson and ghostwriter. If you possessed a modicum of self-respect, I reasoned, why should you run errands, speak for another or write for somebody? If you can become a secretary, why not become a presidential secretary? Even that was not because I coveted the position of a presidential aide.

 

There’s an old saying in Korea: You’ve got to enter a tiger’s den if you want to catch a tiger. This was not to say that I thought of harming anyone, but it was rumored that President Syngman Rhee, the first president of the Republic of (South) Korea, was surrounded by a pack of sycophants and schemers blinding him to the true state of affairs. If I worked for him, I would open up the President’s eyes and ears to people’s needs and problems. In fact, I had secured glowing recommendations from several VIPs for a protocol post of the Kyungmudae, the President’s Office - now called the Blue House.

 

After graduating from the Kyungnam Girl’s High School in Busan, my Cosmos attended the School of Pharmacy, Ewha Women’s University in Seoul. Before going home for the winter break of 1959, she gave me a copy of Dante’s ‘The Divine Comedy’ as a Christmas present.

 

I was going to visit her and meet her parents in Busan as soon as I received my official appointment. In case I couldn’t make it for some reason, I also made an appointment to see her on the next Valentine’s Day on February 14, 1960 at the Lake Restaurant in Seoul.

 

A few days later I fled the capital. Because of the active part I took and played in the student movement, I had to go into hiding. After going under- ground, I wrote a letter to my Cosmos. Writing in ink wouldn’t convey the urgency and the intensity of my love for her, so I drew blood from my forearm and calligraphed the note in blood. Apologizing for not keeping the appointment, I begged for her understanding and asked her to wait for me until I could contact her. My message to her was rolled into a parcel and mailed.

 

Apparently frightened by this shocking blood-letter, she replied with a short note saying, “Please forget me.”

 

Falling into an abyss of despair, I devised a plan on how to take my own life. If I could find a boat, I would row it as far as I could in that great expanse, the sea and the sky, often likened to a life-journey itself. If not, I would simply jump into the sea and swim as far as I could.

 

As if drawing a long-kept sword, I wrote a suicide note:

 

Dear Cosmos,

 

Call me a crazy, stupid madman or what you may.

I’m going to jump into the sea, into the bosom of the Cosmos.

After sending this parting note off, I threw myself into the East Sea.

 

Were life and death indeed providential? My one life was miraculously spared, escaping from nine deaths. In the hopeless turmoil, I hurt my back and was hospitalized. After my surgery at the Medical Center in Seoul, the simmering Student Uprising of April 19, 1960, finally erupted.

 

Reading newspapers one day, I spotted someone identified as Cosmos on the list of donors helping the victims of the Uprising who were killed or wounded by the police. I intuited that it was my Cosmos! She was grieving over my victimhood, for sure. I was deeply moved. Even if I were to breathe my last at that very moment, I could not have been happier.

 

After one surgery I recuperated, but I pretended otherwise and underwent two more surgeries. Following operations on my spine to remove herniated discs, I wished I would have never awakened from the anesthetic. But even if I came to myself, I would be happy with vivid memories of my Cosmos forever.

 

Hospitalized for almost a year, thinking of my Cosmos day and night, I happened to read a newspaper article on graduating students of Ewha Women’s University. My Cosmos was a senior there.

 

Asked about their personal views on marriage, a few students said they didn’t want to get married at all. One observation, in particular, was penetrating: Man’s life seems too tough and tragic. These words took away my breath and soul. Oh, my goodness, my Cosmos thought I was dead and couldn’t forget me. And she wouldn’t marry. What a horrible thing I’ve done to her. I’ve got to set her free from this nonsense.

 

Then I panicked when I recalled hearing that someone became impotent after a spinal surgery. “Have I become impotent too? Even if not, could I father a child?” I asked myself. I was apprehensive of my conditions. Only after my sperm was tested and I received a clean bill of health, did I write to my Cosmos for an appointment to meet her at the Lake Restaurant on the next Valentine’s Day, February 14, 1961. I planned to get the two families together to arrange for the two young people‘s engagement.

 

I went to her school to check if she got my letter. The letter was still in the school mailbox, uncollected. I inquired her whereabouts and went to deliver it myself. In no time, after speaking with her, it dawned on me that mine was the typical case of misconception at liberty and delusion at sea.

 

She told me that she was seeing another man. Thunderstruck by the harshness of reality, I wished her all the happiness. And I mused.

 

Was the grass wet with early morning dew to pay my dues of life and love?

 

Were they dewdrops of life-giving and love-making, or rather teardrops of joy and sorrow?

 

Was that for breathing in this magic world to the full, and breathing it out to the last, before transforming back into the mystical essence of the cosmos?

 

All the while living my life for eighty-five years, I’ve never even dreamed that there would be a day like today, one day. Looking back, Had I not lost my first love sixty years ago, I could not have come to realize that I, and all others, all beings are ‘Cosmians’ born ‘Arainbow of Love’ from the Cosmos. A young boy who happened to fall in love with the microcosmos of a flower ended up embracing the whole of the macrocosmos, the Cosmos itself.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1230ts@gmail.com


전명희 기자
작성 2021.04.29 10:27 수정 2021.04.29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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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