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의 항간세설] 처음의 처음으로 돌아가야

이태상

“세계는 ‘가보지 않은 영역’으로 접어들었고 세상은 코로나바이스러 같은 질병에 대비하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The world was entering into ‘uncharted territory’ because it was not prepared for a pandemic like COVID-19, the disease caused by the novel coronavirus.)”
 
2020년 4월 12일 일요일 영국 BBC와 가진 화상 인터뷰에서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로 자선사업가인 빌 게이츠 (Bill Gates, 1955 - )가 한 말이다.

 

그는 지난 2015년 3월 16일부터 닷새간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TED(기술 Technology, 오락 Entertainment, 구상 Design의 약자) 회의에서 이렇게 경고했었다.

 

“앞으로 다음 수십 년 동안 수천만 명 이상의 사람 목숨을 앗아갈 것은 전쟁이나 미사일이 아니고 전염성이 강한 바이러스 미생물일 것이다. (If anything kills over 10 million people in the next few decades, it’s likely to be a highly infectious virus rather than a war, not missiles, but microbes.)”
 
“신(神)이여, 바꿀 수 없는 것은 편안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은총을, 바꿔야 할 것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그리고 이 둘을 분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God, give us grace to accept with serenity the things that cannot be changed,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that should be changed, and the wisdom to distinguish the one from the other.)”
 
오바마 전(前) 미국 대통령도 좋아한다는 미국 신학자(神學者)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1)의 유명한 기도문이다. 이런 지엽적(枝葉的)인 구두선(口頭禪)보다 근본적(根本的)인 깨우침의 자각(自覺)이 있어야 하는 이 절박(切迫)한 지구촌 만백성에게 전(傳)하는 절실(切實)한 메시지가 있다.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는 동학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의 사상을 소개한다.

 

정치가 바뀐다고 삶이 근본적으로 달라지지는 않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지배와 종속으로 얼룩진 인간과 사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뒤집는 것이 최시형의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의 스승 최제우(崔濟愚 1824- 1864)는 ‘시천주(侍天主)’라 하여, 자아 바깥에 존재하는 초월적 인격신으로서의 하늘을 모셨지만 최시형은 ‘양천주(養天主)’라고 자아의 내부로 들어온 하늘, 즉 내재(內在)하는 천주를 기르자고 했다는 설명이다. 천주의 내재성에 대한 그의 신념은 확고해 마침내 ‘이천식천(以天食天)’의 새로운 경지를 열어 인간은 자신만큼이나 존귀한 만물(萬物)의 도움으로 삶을 영위한다는 자각을 일깨운다는 말이다.

 

최시형이 강조한 우주 자연과 인간의 관계회복이 현재 인류가 직면한 이상기후와 전대미문의 질병을 극복하는 길일 수밖에 없다는 진단이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먼저 하늘과 땅과 사람, 천(天) 지(地) 인(人)이 하나임을 깨닫고 처음의 처음으로 돌아가야 하리라.
 
박종익 강원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이렇게 다섯 친구들과 친해지길 권하고 있다.
 
“일생을 거의 유배지에서 보냈던 윤선도는 조선시대 때 이미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신 분이다. 그의 대표적인 오우가(五友歌)에서 수(水)의 부단(不斷)함, 석(石)의 불변(不變)함, 송(松)의 불굴(不屈)함, 죽(竹)의 불욕(不欲) 그리고 월(月)의 불언(不言)을 다섯 친구에 비유하며 그 덕목을 칭송하였다. 본의 아니게 유배 생활을 하게 된 요즘이 그동안 내 건강을 지켜주었고 앞으로도 평생을 함께할 친구를 모든 분께 소개할 좋은 기회인 것 같다. 밥의 부단(不斷)함, 땀의 불변(不變)함, 책의 불굴(不屈)함, 말의 불욕(不欲) 그리고 잠의 불언(不言)이 내 친구들의 덕목이다.”
 

이어서 우리 고영민 시인의 ‘손등’을 음미해보리라.
 
울고 싶을 때 울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나라
어떤 미동(微動)으로 피었느니
곡진하게
피었다 졌느니
꽃은 당신이 쥐고 있다 놓아버린 모든 것
울고 싶을 때 울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나라
마음이 불러
둥근 알뿌리를 인 채
듣는
저녁 빗소리
 
이 시에 장석주 시인은 이렇게 주석을 단다.
 
“배롱나무와 자귀나무의 꽃은 손꼽을 만한 여름꽃이다. 둘 다 붉고 아름다운 꽃들이다. 배롱나무꽃을 보다가 문득 ‘꽃은 당신이 쥐고 있다 놓아버린 모든 것’이라는 시구를 떠올렸다. 생물 종(種)들이 궁극의 목적으로 삼는 것은 자기 복제다. 꽃과 열매는 식물 종들이 다음 세대에게 제 생명을 복제해 넘겨주는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꽃은 식물적 생명의 파동이자 존재의 융기(隆起)다. 꽃이란 동물의 생식과 섹스의 범주에 드는 일이다.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의 실체다. 꽃이 그렇듯이 사랑은 존재의 본성(本性)이자 열락(悅樂)이다. ‘둥근 알뿌리를 인 채’ 저녁 빗소리를 듣는 이는 사랑에 빠진 자다.”
 
일찍이 공자(구멍 공 아들 자 孔子 기원전 551-기원전 479)는 인간사회에서 뭣보다 중요한 것이 어질 인(仁)이라고 했다. 공자의 사상을 다섯 글자로 표현한다면 충(忠), 효(孝), 인(認), 의(義), 신(信)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중 가운데 글자가 인(仁)인데 이 글자를 눈여겨보자.  사람 인(人)에다 둘 이(二)를 합한 것으로 두 사람 사이 대인관계에 있어야 할 충의(忠義), 효의(孝義), 인의(仁義), 신의(信義)를 뜻한다. 그런데 이 의(義)는 양(羊)이 나 아(我) 위에 있는 형상이다. 태곳적 옛날부터 양이란 동물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순결과 친절과 어질고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이웃에게 언제나 사심 없이 순수하고 친절하고 착하고 아름답게 대하라는 지침인 것 같다. 여기서 효(孝) 자(字)를 보면 자식이 연로한 노인을 업는다는 경로사상을 의미하는가 보다. 그렇다면 이 인(仁) 이야말로 참 ‘사랑’의 큰 개념으로 진정코 삶에 의의(意義)를 부여하는 것이리라.

 

공자가 기독교의 신(神)을 실직자로 만들었다. 17-18세기 유럽 사상사에서 공자철학의 족적을 탐사해 온 황태연 동국대 정치 외교학과 교수의 진단이다. 종교에 속박돼 있던 유럽인들에게 인본주의를 일깨우고, 신(神)의 계율 없이도 윤리 도덕을 준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관념을 불러일으킨 인본주의가 곧 아시아에서 건너간 공자철학의 영향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공자철학의 사상사적 의미를 지닌 책이 2015년 5월 출간된 ‘공자, 잠든 유럽을 깨우다’이다. 정치철학자이자 동서양 철학을 하나로 꿰는 황 교수가 김종록(문화국가연구소장) 작가와 함께 집필한 저서다. 김종록이 묻고 황태연이 답하는 방식으로 공자철학의 의미를 짚어본다. 장세정 기자의 인터뷰 기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합리주의는 결과적으로 나쁜 게 아니라 처음부터 나쁘다. 인간은 감성과 이성이 반반이 아니라 대부분의 인간은 감성이다. 감각과 감정의 능력을 감성이라고 부른다. 감성의 보조제나 보강재로 보면 이성은 좋은 거다. 그런데 인간은 80-90%가 감성적 존재인데 이성이 감성을 대체할 때 합리주의는 감성을 억압하게 된다. 감성을 합리주의로 대체해 그것으로 사회체제와 정치체제를 만들면 사람은 어떻게 되겠나. 공산주의나 히틀러의 나치즘도 합리주의의 산물인데 이것들이 인간을 억압하고 인권을 침해했다.”
 
흥미롭게도 같은 날짜 (7월 24일) 미주판 중앙일보 오피니언 페이지 ‘삶의 향기’ 칼럼에서 전수경 화가는 다음과 같은 말로 감성적인 그림을 그린다.
 
“무덥다. 몸에 걸친 모든 것이 원망스럽다. 누구나 벌거벗은 채 태어나고 죽어 염할 때 벗겨진다. 가리면서 삶이 시작되고 벗으면서 삶이 끝난다. 목욕이나 사랑을 나눌 때 벌어지는 일은 누구에게도 쉽게 말할 수 없다. 말할 수 있는 것은 가렸을 때뿐이다. 가리는 것과 벗는 것, 그 중간 수위가 노출이다.
 
예술과 외설의 한계는 여전히 종잡기 힘들다. 예술의 노출은 진실을 드러내고 자유로워지려는 열망에서 출발한다. 문제는 그것이 특정한 개념과 형식 없이 까발려지고 방종하게 되면 외설로 변질된다는 점이다. 그 분수령은 어디쯤일까. 샤넬 (코르셋과 긴 치마에 갇혀 있던 유럽 여성들의 몸을 해방시킨 혁명가, 프랑스의 코코 샤넬)은 ‘럭셔리는 빈곤함의 반대말이 아니라 천박함의 반대말’이라며 자신을 드러내는 건 사치가 아니라고 노출을 옹호했다.

 

속옷의 노출은 곧 단정치 못하거나 야한 것으로 취급됐다. 이 금기를 깬 인물이 레슬리 웩스너다. 그는 파산 직전의 빅토리아 시크릿을 인수해 세계 최고의 속옷 체인으로 일구었다. 그의 성공은 발상과 관점의 전환에서 비롯됐다. 그는 숨기고 가려져야 할 속옷을 드러내게 했다. 짙은 색 브라의 끈을 어깨에 노출시켰고, 여성 팬티의 아름다운 레이스를 겉옷 밖으로 드러내게 했다. 그뿐 아니라 란제리 패션쇼를 열어 여성에게 속옷은 숨기고 싶은 게 아니라 은근히 뽐내고 싶은 품목임을 증명했다. 웩스너에게 붙은 ‘여성의 마음을 훔친 남자’라는 별명이 전혀 터무니없는 게 아니다.
 
모이레는 화가다. 자화상과 누드 크로키는 숙명이자 일상 다반사다. 2014년 6월 바젤아트페어에 초대받지 않은 스위스의 행위 미술가 밀로 모이레가 하이힐을 신고 검정 핸드백만 멘 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온 전시장을 누볐다. 그녀의 몸에는 부위마다 브라, 셔츠, 바지와 같은 단어들만 쓰였다. 옷으로 몸을 가리는 허위를 비꼬았다. 그녀의 천연덕스러운 돌출행동은 하나의 사건으로 비쳤고, 여러 매체를 통해 널리 알려 졌다. 그녀의 맨몸 행위예술을 일견 지지하고, 샤넬과 웩스너의 과감한 노출 발언도 옹호하는 쪽이다.”
 
어쩜 이것은 앞에 언급한 대로 서양 기독교의 신본주의(神本主義)가 동양 공자철학의 영향으로 인본주의(人本主義)로 진화(進化)한 것이었다면 이 인본주의가 자연의 지구생태계를 파괴해온 물질문명의 합리주의 멍에를 벗어버리고 본연의 자연으로 돌아가는 감성적인 자본주의(自本主義)를 예술적으로 시사하는 것이리라.
 
자, 이제 맨몸의 신비로운 여체(女體)를 연상시키는 강기원 시인의 시 ‘복숭아’를 음미해보리라.
 
사랑은 …그러니까 과일 같은 것
사과 멜론 수박 배 감…다 아니고
예민한 복숭아 손을 잡고 있으면 손목이,
가슴을 대고 있으면 달아오른 심장이,
하나가 되었을 땐 뇌수마저 상해가는 것
사랑한다 속삭이며 서로의 살점을 남김없이 빨아먹는 것
앙상한 늑골만 남을 때까지…그래, 마지막까지 함께
썩어 가는 것…
썩어 갈수록 향기가 진해지는 것…
그러나 복숭아를 먹을 때 사랑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 너무도 감성적인 시를 장석주 시인은 또 이렇게 변주(變奏)한다.
 
“사랑은 영혼을 교란시킨다. 전대미문의 혼란을 겪는다. 사랑은 방향감각을 잃고 갈팡질팡하며, 비현실적 환상 속을 헤매 일상이 뒤죽박죽 엉키게 만든다. 사랑이란 뇌수마저 송두리째 서서히 물크러지며 상해가는 것이거나 상대 살점을 남김없이 빨아 먹는 것이다. 사랑이 깊으면 광기도 깊다. 썩어 가는 과일이 그렇듯 무르익은 사랑의 향기도 진동한다. 하지만 어떤 사랑이든지 사랑은 불완전한 완전이고, 두 번 반복되지 않는 기적이다. 사랑하면 신(神)의 영역까지 넘본다. 제 사랑을 감히 ‘영원(永遠)’과 ‘불사(不死)’에 매달고 끌어달라고 간청한다.”
 
2020년 4월 12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부활대축일 미사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세계적 피해에 대해 “지금은 무관심과 이기심, 분열과 망각의 때가 아니다. 서로 단결해야 한다”며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문제를 사라지게 하는 마술의 주문이 아니라 악의 뿌리에 거두는 사랑의 승리이며, 악을 선으로 바꾸는 승리”라고 했다는 보도다.
 
2015년 7월 9일 볼리비아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돈을 ‘악마의 똥’에 비유하며 “돈에 대한 무분별한 추종이 세상을 지배하고 공익을 위한 헌신은 내버려 졌다. 자본이 우상이 돼 사람들의 판단을 좌우하고, 탐욕이 전체 사회 경제 체제를 주도하게 되면 사회는 망가진다. 돈은 남자와 여자를 노예로 만들고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게 만들어 우리의 공동체를 무너뜨린다.”라고 신랄히 비판, 경고했었다.
 
옛 조선의 임금님들이 머리에 쓰던 관을 익선관(翼善/蟬冠)이라고 하는데 그 형상이 매미를 연상케 한다. 이 익선관의 ‘선’ 자(字)를 착할 선(善)이나 매미 선(蟬) 자로 함께 쓰는 이유는 매미가 다섯 가지 덕(德)을 갖춘 곤충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매미의 오덕(五德)으로 문(文), 청(淸), 염(廉), 검(儉), 신(信)을 말하는데 임금은 항상 배우고 익혀, 탐욕과 사념을 버려야 하며, 염치를 차리고 검소해야 하며 신의를 중히 여겨 선정을 베풀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맴 맴 맴 매미 소리가 몹시도 그립고 아쉬워진다. 우리 인류 모두가 어서 매미를 스승으로 모시고 처음의 처음으로 돌아가 자본주의자(自本主義者) 코스미안이 되어야 하리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1230ts@gmail.com

 

작성 2023.02.04 11:12 수정 2023.02.04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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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