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규 기자의 눈] 이순신 장군의 작품 읽기

오언한시 ‘비바람 부슬부슬 흩뿌리는 밤’

 



개인이 좌절을 겪을 때 가장 쉬운 변명은 자신이 처해있는 환경을 탓하는 것이다. 실제로 어떤 사람은 과정과 절차를 어기면서 자신은 전혀 아무런 잘못이 없지만 주변 상황이 자신을 받쳐주지 못해서 실패를 겪었다라고 이야기 한다. 이것은 핑계다. 해결을 위한 과정과 절차를 무시하며 남탓만 하는 것에 매몰되는 것을 올바른 모습이라 할 수 없다.

 

이순신 장군은 환경을 탓하지 않았다. 외부로 탓을 돌리며 좌절하는 것이 아닌 자력사랑의 정신으로 자신이 처한 본분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이러한 모습은 피난을 가다가 의주에 이르렀을 때 환경에 탓을 돌렸던 선조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는 변명만 하고 당파싸움으로 책임을 돌렸던 선조의 시는 다음과 같다.

 

나라는 갈팡질팡 어지러운데

충신으로 나설 이 그 누구인고

서울을 떠난 것은 큰 계획이요

회복은 그대들에게 달려 있나니

국경의 달 아래서 슬프게 울고

압록강 강바람에 아픈 이 가슴

신하들아 오늘을 겪고 나서도

그래도 동인 서인 싸우려느냐.

 

편의를 위해서 국문으로 적었지만, 사실 이 시는 오언율시의 한시로 선조의 뛰어난 문장력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하지만 뛰어난 문장력과는 별개로 백성과 영토를 버리고 피난을 떠난 점을 정당화하고, 뒷수습은 그대들로 정의되는 의병과 장수들에게 맡기며, 이 혼란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 아닌 당파싸움에 돌리고 있다.

 

개인이 자신이 처한 고난을 사회 및 환경의 탓으로 돌리는 대표적인 모습을 선조는 시를 통해 보여줬다. 이러한 태도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실제 선조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피난만 다니고 변명만 했을 뿐 난국의 수습을 위해서는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다. 과정과 절차에 대한 존중이 없이, 근시안적 관점으로 환경만 탓하며 자신만 생각하는 것은 실제 문제해결에는 도움조차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은 그렇지 않았다. 저만 살겠다고 피난을 떠난 선조의 변명과 다르게 적절한 과정과 절차를 밟으며 조선을 위해 왜군을 막을 방법을 구상했다. 선조의 시에 대해 이순신 장군은 답시를 지었는데, 이 시속에서도 선조와 대비되는 이순신 장군의 정신이 잘 나타난다.

 

蕭蕭風雨夜(소소풍우야) 비바람 부슬부슬 흩뿌리는 밤

耿耿不寐時(경경불매시) 생각만 아물아물 잠 못 이루고

懷痛如嶊膽(회통여최담) 쓸개가 찢기는 듯 아픈 이 가슴

傷心似割肌(상심사할기) 살을 에는 양 쓰린 이 가슴

 

山河猶帶慘(산하유대참) 강산은 참혹한 모습 그대로이고

魚鳥亦吟悲(어조역음비) 물고기와 새들도 슬피 우네.

國有蒼黃勢(국유창황세) 나라는 허둥지둥 어지럽건만

人無任轉危(인무임전위) 바로잡아 세울 이 아무도 없네.

 

恢復思諸葛(회복사제갈) 제갈량 중원 회복 어찌 했던고

長驅慕子儀(장구모자의) 말 달리던 곽자의 그립구나.

經年防備策(경년방비책) 원수 막으려 여러 해 했던 일들이

今作聖君欺(금작성군기) 이제 와 돌아보니 임금만 속였네.

 

이 시는 각각 기승전결의 구조를 취하는 오언절구가 3번 반복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첫 번째 오언절구는 자연을 바라보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가슴아파하고 있다. 두 번째 오언절구에서는 전쟁 속 조선의 상황을 묘사하며 나라를 지킬 사람이 부족한 상황을 안타까워한다. 마지막 오언절구는 중국의 역사 속 이야기를 들며 자신의 노력이 부족했다는 이야기를 임금을 속였다라는 구절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 시는 교착 상태에 빠진 전쟁 상황에서 자신의 심경을 전하고자하는 이순신 장군의 우국충정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첫 오언절구에서는 안타까운 마음을, 두 번째 오언절구에서는 나라의 상황을 해결한 인재가 없는 상황을, 마지막 오언절구에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외부에 상황을 돌리는 것이 아닌 자신의 탓을 하고 있다.

 

시를 지은 이후에도 이순신 장군은 절망적은 상황 속에서 절망의 감정에만 빠지는 것이 아닌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올바른 과정과 절차로 난국수습을 위해 노력했다. 같은 상황 속에서 선조는 외부에 도움을 청하고 요행을 바라는 길을 선택했다면, 이순신장군은 스스로에게 책임을 돌리며 더 노력하는 길을 선택했다. 이는 자력정성의 차이이다.

 

선조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남의 탓만 했지만, 이순신은 상황에 대한 원인을 외부가 아닌 내부로 돌렸기 때문에 극한 상황 속에서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극한 상황에서 외부에 탓하는 것은 손쉬운 변명이다. 자포자기하고 남의 도움만 바라는 길로 흐를 수도 있다. 상황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에게 돌려 적극적으로 돌파하려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자신을 끊임없이 닦고 돌아보는 수양이다. 수양의 유무가 이순신과 선조 간의 리더십의 차이를 만들었다.

 

이러한 차이는 당대 상황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적용될 수 있다. 사회와 개인의 갈등에서 선조의 길을 택할지 이순신의 길을 택할지는 우리의 선택이다. 선조와 이순신의 갈림길 속 개인적 차원의 선택은 개인의 삶의 모습을 바꾸지만, 리더의 선택은 조직 전체의 운명을 가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순신 정신이 세상을 살아가는 보편적 정신으로 중요하지만, 리더가 될 사람에게 더더욱 강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편집부 기자
작성 2019.05.01 09:41 수정 2019.05.01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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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