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존재가 된 사람들
재난이 터질 때마다 익숙하게 들리는 문장이 있다. “사망자는 모두 비정규직이었습니다.” 태안 화력발전소의 김용균, 이천 물류창고 화재의 희생자들, 그리고 쿠팡 덕평물류센터 화재 당시 숨진 구조대원조차 계약직이었다.사고가 반복될 때마다 우리는 묻는다. 왜 또 비정규직인가.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다시 묻는 걸 멈춘다. 잊힌다. 마치 투명인간처럼.
비정규직은 이 사회가 필요할 때 쓰고, 위험해지면 외면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들은 그 ‘투명성’으로 인해 더 큰 위험 속에 노출되고 있다. 오늘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왜 비정규직은 항상 위험의 전방에 서야 하는가?
한국 사회에서 비정규직이 된다는 것
한국 사회에서 ‘비정규직’이라는 말은 단순히 ‘계약 기간이 짧은 일자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곧 ‘해고되기 쉬운 사람’, ‘대체 가능한 사람’, 그리고 ‘덜 대접받아도 되는 사람’이라는 사회적 인식과 연결된다.
2024년 현재, 한국의 전체 노동자 중 약 35%가 비정규직이다. 이들은 계약직, 일용직, 파견·용역, 플랫폼 노동자 등 다양한 고용 형태로 존재하지만, 이들의 삶을 관통하는 공통점은 분명하다. 고용이 불안정하며, 정규직보다 낮은 임금을 받는다. 복지나 사회안전망으로부터 배제되기 쉬우며, 노동조합과 같은 조직적 보호 장치도 갖기 어렵다.
이러한 비정규직의 위치는 직장 내 위계구조를 고착화하는 기능도 한다. 정규직이 꺼리는 위험하고 불안정한 업무는 주로 이들에게 전가된다. 하지만 정작 이들은 근로자 권리를 주장할 기회조차 제대로 갖지 못한다. 노동조합 가입률이 현저히 낮고, 자신을 대변할 수단조차 제한되어 있다.
결국 비정규직 문제는 단순한 고용구조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노동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우하는지에 대한 보다 깊은 사회문화적 구조의 문제다. 비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는 한 사람의 경제적 지위를 넘어서, 존재 자체의 ‘가벼움’을 규정하고 있는 셈이다. 위험은 쉽게 떠넘기고, 책임은 외면하며, 보호는 보장되지 않는 자리. 바로 그곳에, 수많은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오늘도 서 있다.

비정규직의 자리, 불평등의 이름들
비정규직 노동자의 자리는 항상 사회의 가장자리, 불평등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에 있다. 그들은 '쓰이고 잊히는 사람들', '같은 일을 해도 덜 받는 사람들', 그리고 '계약 한 장으로 생존이 결정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우리가 ‘다르게 대우해도 괜찮다고 여기는 사람들’이다.
“가장 먼저 쓰이고 가장 빨리 잊힌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대부분 위험한 작업에 우선 투입된다. 그러나 이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제대로 된 보호도, 안전망도 아니다. 언론은 재난이나 사고가 발생했을 때만 이들의 이름을 호출한다. 하지만 이들의 일상은 이미 그 자체로 재난에 가깝다.
현장에서의 안전교육은 형식적으로 이뤄지고, 작업 장비는 낡아 있다. 매뉴얼은 부실하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고, 안전 조치는 뒷전으로 밀려난다.
2023년 서울 지하철 선로 작업 중 목숨을 잃은 외주노동자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는 열차가 다가오는 줄도 모른 채 선로에 서 있었고, 그의 죽음은 ‘개인 부주의’라는 말로 정리됐다. 하지만 그가 있었던 곳은 시스템의 사각지대였으며, 그의 사망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일은 같은데, 처우는 왜 다른가”
같은 업무를 수행함에도 비정규직은 정규직보다 낮은 임금을 받는다. 그 격차는 많게는 40%에 달한다.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청소노동자들을 예로 들면, 정규직은 상여금과 복리후생, 충분한 휴게시간을 보장받는 반면, 비정규직은 이를 거의 누리지 못한다. 그들은 같은 사무실, 같은 공간에서 일하지만 다른 지위, 다른 조건 속에 존재한다.
여기에 더해 비정규직의 상당수는 여성이다. 특히 돌봄, 간병, 청소, 유통, 콜센터 등 여성 중심의 직종은 저임금, 비정규직, 감정노동이라는 ‘삼중고’가 구조적으로 고착되어 있다. 이 문제는 단순히 시장에서의 수요·공급 문제로만 설명될 수 없다. 오히려 성별, 직종, 계약형태에 따라 차별을 내면화하고 정당화하는 제도적 장치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내재되어 있다는 증거다.
“계약서 한 장이 생존권을 가른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은 한 장의 계약서에 좌우된다. 계약이 끝나는 순간, 그들은 곧바로 일자리를 잃는다. 정규직은 ‘정당한 해고 사유’가 없는 한 고용이 유지되지만, 비정규직은 계약 만료만으로도 해고가 정당화된다.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나 기간제 교사들은 학기 단위로 고용되어 방학이 되면 자동 해고된다. 다음 학기에도 재고용될지 확신할 수 없어 생계는 늘 불안정하다.
더 나아가 플랫폼 노동자들은 ‘근로자’로조차 인정받지 못한다. 이들은 법적으로 ‘개인사업자’로 분류되어 4대 보험, 유급휴가, 최저임금 보호를 받지 못한다.
배달기사, 대리운전기사, 온라인 쇼핑몰 상품등록 아르바이트 등은 단 한 번의 별점 하락, 소비자의 신고, 알고리즘 변경으로도 바로 ‘퇴출’당할 수 있다. 계약서 없이 시작하고, 계약서 없이 끝나는 그들의 노동은 그만큼 가볍게 취급된다.
비정규직은 ‘다르게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다르게 대우받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처한 현실은 개인의 능력이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이 불평등한 구조를 직시하지 않는 한, 우리는 또다시 같은 사고를 반복하고,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
이름을 지우고, 구조를 다시 써야 할 때
비정규직은 단순한 고용형태가 아니다. 그것은 이 사회가 부여한 하나의 낙인이다. 그 낙인은 곧 ‘덜 중요한 사람’, ‘덜 보호받아도 되는 사람’이라는 인식으로 이어지고, 그렇게 고착된 시선은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을 구조적 불평등의 또 다른 이름으로 만들어왔다.
이제 바뀌어야 할 것은 계약서의 문구나 기간만이 아니다. 노동을 대하는 이 사회의 구조 전체가 다시 쓰여야 한다.
동일한 일을 한다면 동일한 임금을 받아야 하고, 누구나 위험한 작업 환경에서 보호받아야 하며, 계약이 끝났다는 이유로 생존권까지 박탈당해서는 안 된다. 계약의 종료는 해고가 아니라, 다시 설 수 있는 출발점이어야 한다.
비정규직이라는 단어가 더는 사회적 취약성을 대변하는 상징이 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은 특정 기업이나 정부의 책임만이 아니다.
그건 우리 사회 전체가 함께 짊어지고 해결해야 할 과제다. 동정이나 일회성 시혜로는 이 문제를 풀 수 없다. 제도적 균형과 사회적 연대, 그것만이 진정한 해답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되물어야 한다.
“나는 정규직이어서 안전한 것일까, 아니면 단지 우연히 살아남은 것일 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