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선의 산사기행] 오봉산 청평사





오봉산 청평사

 

눈이 내렸다. 일월의 눈은 속살거리는 애인처럼 따뜻하다. 눈이 내린 서울을 떠나 춘천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겨울기차는 눈처럼 따뜻하고 눈처럼 차갑다. 용산에서 떠나는 청춘열차는 낭만을 싣고 춘천으로 간다. 춘천에 낭만이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갖기엔 나는 세월을 너무 많이 소비했다. 그래도 청춘열차의 낭만은 인생의 비타민 같은 묘약이다. 감춰둔 보물처럼 신비로운 묘약을 찾아 우리는 한 생을 바치는지도 모른다. 개뿔 같은 환상이지만 젊어서나 늙어서나 낭만이라는 묘약 하나쯤은 마음속 깊이 숨겨 두어도 괜찮다.

 

새들은 페루로 떠나고

그녀는 카일라스로 떠났지

두 개의 항로를 잃고 나는

낭만공장 공장장을 찾아 갔어

부패하지 않는 낭만하나

튼튼하게 만들어 달라고 졸랐지

~~낭만공장 공장장

~~똥고집을 부리네

만들라는 낭만은 안 만들고

깨지기 쉬운 사랑만 만드네.

 

어느 해, 나는 낭만공장 공장을 찾아가서 부패하지 않는 낭만 하나를 튼튼하게 만들어 달라고 졸랐다. 깨지지 쉬운 사랑만 만드는 낭만공장 공장장에게 눈을 흘기고는 집으로 돌아와서 춘천으로 떠나 버리려고 했었다. 그러나 떠나지 못했다. 사는 게 다 그렇지 않던가. 이 일이 끝나면 저 일이 생기고, 저 일이 끝나면 또 다른 일이 생기는 게 인생이다. 나는 이 일과 저 일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불현듯 춘천으로 가는 청춘열차에 올라탔다. 청춘을 실은 기차가 낭만 바퀴를 굴리며 춘천으로 달려갔다.

 

기차는 청춘열차라는 이름을 달고 청춘처럼 달렸다. 높아졌다가 낮아졌다가 하는 산들을 밀어내고 울울울 흐르는 겨울 강물을 거슬러 올라갔다. 나와 마주보며 앉은 연인은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종일 속살거리며 웃음을 달고 있었다. 나는 눈길을 어디에 둘지 몰라 창밖의 겨울풍경을 좇았지만 열어둔 귀는 제대로 호강하고 있었다. 봄의 도시 춘천을 여행지로 삼은 것은 어쩌면 행운인지 모른다.

 

춘천, 참 많이 왔던 도시다. 그리운 문우를 찾아 왔었고 호수가 좋아서 왔었고 춘천이라는 이름이 좋아서 왔었고 고독의 빛깔을 찾아 왔었고 물의 문을 찾아 왔었고... 참 많이 왔었지만 춘천은 또 와도 좋은 곳이다. 나는 오리털패딩에 손을 깊숙이 찔러 넣고 청평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눈이 내린 춘천은 고요했다. 오봉산 깊은 골짝에 숨어 있는 청평사를 찾아가는 길은 낮은 골짝을 몇 개 지나고 멀리 소양호를 빙 둘러가서야 초입에 이르렀다. 눈과 바람이 햇살보다 먼저 나와 청평사로 가는 길을 에워싸고 있었다. 청평사 앞을 지키고 있는 가게들도 이제야 하나 둘 문을 열고 있었다. 나는 추위를 녹일 겸 해서 마음씨 좋아 보이는 할머니 포장마차에 들어갔다. 아직 끓지 않은 어묵을 기다리리고 있는데 막걸리라도 한 잔 하라는 할머니 말에 히죽 웃으며 막걸리 병을 땄다. 아침 댓바람부터 먹는 막걸리 맛은 기가 막히게 좋았다. 막걸리의 찬 기운이 오장육부를 타고 내려가 온갖 시름을 다 씻어주는 것 같았다.

 

주변머리 없는 나는 청평사 같은 절을 좋아한다. 청평사는 소양호에 갇힌 섬 속의 절이다. 바로 앞에 소양호를 거느리고 있지만 오만하지 않은 절이다. 그래서 지치고 힘들 때마다 비실거리면서 찾아올 수 있는 곳이 청평사다. 서울을 떠나 만날 수 있는 만만한 거리에 있어서 좋다. 내 앞에 놓인 일상의 버거움을 털어 내려고 오지만 늘 미안한 마음이 드는 곳이다. 청평사가 거기 있어서 나는 참 좋다.

 

눈모자를 쓰고 고요하게 앉아 있는 청평사엔 방금 다녀간 바람이 처마 끝 풍경을 희롱했는지 뎅뎅뎅 거리고 있었다. 2층 옥개석만 남아 있는 공주탑의 고요를 희롱한 바람은 저 하늘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상삿뱀에 몸이 감겨 고생을 하던 원나라 공주가 이 절에 와서 가사불사를 한 뒤 상삿뱀을 물리치게 되자 원나라의 황제였던 원순제가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세웠다는 전설도 청평사의 스토리텔링에 한몫하고 있다. 청평사는 설악산에 있는 신흥사의 말사라는데 거리상으로 따져 보아도 신흥사가 얼마나 많은 절을 거느리고 있었는지 짐작이 간다.

 

대개의 절집이 그렇지만 청평사는 깔끔한 새댁 같은 절이다. 시간으로야 천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곱고 어여쁘다. 아무도 없는 듯 풍경만 홀로 흔들거리는데 나는 짊어지고 온 근심을 부려놓고 부처님 앞에 앉아 합장을 했다. 부처님도 혼자고 나도 혼자다. , 지리멸렬한 이 겨울고요를 어찌해야 할지 몰라 나는 얼른 문을 열고 나와 겨울하늘만 올려다보았다.

 

새해 첫 여행을 춘천으로 와서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계획이나 바람 같은 게 얼마나 소용없는 일이라는 아는 까닭이다. 이번에는 내가 나에게 속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청평사처럼 그냥 그 자리에서 눈모자를 뒤집어쓰고 소양호나 바라보면서 늙어 가면 좋을 것이다. 그 이상 무얼 바라겠는가.




전승선 poet1961@hanmail.net











전승선 기자
작성 2020.02.17 09:43 수정 2020.02.17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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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