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토니아의 휴양지 파르누를 출발한 지 1시간 반 지나자 라트비아 국경에 도착한다. 여기서부터 울창한 자작나무 숲길 사이로 난 도로를 질주한다. 벌, 곤충, 벌레들이 차량 유리창에 들러붙어 차량 운행을 방해한다 하여 도로가에는 풀베기 작업이 한창이다. 리가에 가까워질수록 발트해에 접한 리가만이 자주 보인다. 국경에서 1시간 정도 걸려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Riga)에 도착한다.
독일 브레멘의 알베르트 주교가 북방 십자군 ‘리보니아 기사단’을 이끌고 발트해 무역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1201년 리가를 선택하면서 리가 역사가 시작된다. 라트비아 국민들은 1차 대전 전까지는 국가 없이 독일의 지배하에 농노 신분이었다. 그들의 역사는 패배자의 기록으로 남겨졌다. 그러나 어려운 순간들을 끝내 이겨낸 그들의 찬란한 여정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남한의 1/3 면적에 인구는 200만 명. 그 중 수도 리가에 1/3 정도 거주하는 작은 나라 라트비아.
동유럽의 파리, 오랜 역사만큼이나 여러 별명을 지닌 리가는 낯선 여행자에게 그동안 간직해온 옛 정취와 얘깃거리를 풀어낸다.
발트해와 다우가바 강이 만나는 항구, 중세 거리를 채우는 클래식 선율, 화려한 아르누보 옷으로 단장한 도시, ‘발트해의 진주’라 불리는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의 풍경은 몽환적인 화음처럼 어우러진다. 리가의 아름다움에 취해 마음을 열고 그 풍경 속을 걷다 보면 누구처럼 영감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2년 간 리가에 살며 동요 ‘소나무야’를 작곡한 독일의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처럼.
도심 한가운데로 3.2km 길이의 필레타스 운하가 흐른다. 도시 운하는 다우가바 강과 함께 중세 때 리가를 방어하는 해자 역할을 한다.
오페라극장 앞의 정원을 지나자 1차 대전 종전 후 잠시 독립국이었던 시절에 건축된 ‘자유의 여신상’이 모습을 드러낸다. 러시아 표드르 대제 동상이 있던 자리에 세운 42m 높이의 여신상은 라트비아 투쟁의 상징이다. 파란색 여인은 자유와 사랑의 여신 밀다이고, 그녀가 들고 있는 별 3개는 라트비아의 비제메, 라트갈레, 쿠르제메 세 지역을 의미한다. 정면에 새겨진 글자는 ‘조국과 자유’다.
라이마 광장은 구시가지 동쪽에 있는 젊음이 넘치는 광장이다. 라이마는 발트 신화에 나오는 행운의 여신이자 라트비아의 유명 초코렛 브랜드다. 광장이라기보다는 사방으로 뚫린 넓은 교차로에서 21세기 인류사적 대사건이 일어난다.
소련과 나치독일이 1939년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비밀협약을 맺는 바람에 발트 3국은 역사에서 사라진다. 비밀협약을 맺은 지 50년이 되는 1989년 8월 23일 나라를 잃은 이들 세 나라 국민 670만 명 중 200만 명이 길로 나선다. 라트비아 리가 구 시가지에 있는 라이마 광장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리투아니아 빌누스, 위로는 에스토니아 탈린까지 600km가 넘는 길 위에서 인간 띠를 만든다. 바로 ‘발트의 길’(The Baltic Way)이다. 저녁 7시가 되자 서로 손을 맞잡고 일제히 자유를 외친다. 발트의 길에서 이들이 부른 자유의 노래는 전 세계로 울려 퍼지고, 2년 뒤인 1991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독립을 되찾는다.
구시가지를 걷다 보면 가끔은 비죽이 나온 돌부리에 걸리기도 할 만큼 거리의 바닥은 고르지 않고 울퉁불퉁하다. 지역 전체가 문화유산이다 보니 발길 닿는 곳마다 역사의 숨결을 간직한 화려한 건축물들을 내내 만날 수 있다. 동화 속 세상을 그대로 재현해놓은 중세시대로의 시간 여행을 가능케 하는 매력적인 여행지다.
구시가지 전역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리가는 13세기 이후 한자동맹을 주도한 맹주답게 중세 건축물들이 잘 보존돼 있다. 라이마 광장에서 오른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골목 안에 제법 높은 붉은 지붕의 원형 건물이 보인다. 스웨덴 군인들이 화약 저장소로 사용한 화약탑이다.
성벽을 따라 가면 성벽과 이어진 스웨덴 문이 나온다. 스웨덴이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기념으로 만든 대문이다. 리가 성벽에 있었던 25개의 문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스웨덴 문에는 슬픈 사연 하나가 전해진다. 당시 리가 여인은 외국 남성을 만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한 여인이 스웨덴 병사와 이 문을 통과해 몰래 만나다가, 문의 벽에 갇혀서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지금도 자정 무렵에 이 문을 지나면 여인의 슬픈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하는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스토리 같아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세상사는 것은 비슷한 모양이다.
스웨덴 문을 통과하자 중세의 시간이 고여 있는 듯한 트록슈뉴 거리로 이어진다. ‘소음의 거리’라는 뜻의 이 길은 13세기에 형성됐는데, 지금은 리가에서 가장 좁고 고요한 골목으로 꼽힌다. 조용한 골목을 벗어나자 중세와 아르누보 건물의 향연이 펼쳐진다.
집 세 채가 나란히 서 있는 삼형제 건물은 구시가지 최고의 명물이다. 오른쪽 흰 건물이 15세기에 탄생한 큰형이고, 왼쪽으로 갈수록 100살 씩 젊어진다. 가만히 보면 늦게 지은 건물일수록 크기가 작은데, 당시 리가에 집 지을 땅이 줄어들어서란다. 이처럼 라트비아 건축의 변천사를 한눈에 보여줘 살아있는 박물관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건물 내부에 건축 박물관이 있다.
구시가 거리의 모퉁이를 돌 때마다 감미로운 음악이 귓가를 파고드는데 삼형제 건물 앞에서는 귀에 익은 ‘백만 송이 장미’ 멜로디가 애잔하게 들려온다.
가수 심수봉이 번안해 부르며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이 곡은 러시아 민요 ‘백만 송이 장미’로 알려져 있으나 실은 리가 출신 라이몬즈 파울스가 작곡한 ‘마리나의 선물(디바야 마리나)’이 원곡이다. 건국 신화 속의 어머니 마리나가 딸에게 행복을 줬으나 딸이 이를 제대로 누리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이다. 이 노래가 큰 인기를 끈 것은 쉽고 아름다운 선율 덕분이기도 하지만 노래 가사가 강대국들의 지배를 받아온 라트비아인들의 굴곡진 삶을 잘 표현했기 때문이리라.
사연을 알고 노래를 감상하면 수 천 년 동안 나라 없는 백성으로 살아온 그들의 한, 애절함, 서러움을 느낄 수 있는데, 우리 민족의 애환과 비슷한 탓인지 연주가 끝났는데도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돔 광장은 리가 구시가지의 중심 광장이다. 많은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광장은 구시가지의 모든 길로 통한다. 노천 카페와 야외 주점으로 법석이는 이곳에서는 각종 행사가 열리는데 오늘은 ‘세계 곰인형 축제’가 열리고 있다. 환웅과 웅녀의 자손이라 그런지 세계 각 나라에서 출품된 다양한 곰들의 모습을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세월에 닳은 돌길은 낯선 여행자도 너그럽게 품어준다. 구불구불한 골목을 따라 이어진 노란색, 하늘색, 빨간색 건물들 사이로 드넓은 시청 광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검은 머리 전당은 광장을 사이에 두고 시청과 마주 서 있다. 15세기 아프리카, 남미를 무대로 무역을 한 청년 상인들이 결성한 조합 건물이다. 과거 상인들의 숙소와 연회장으로 사용되었는데, 파괴와 재건축을 반복하다가 1948년에 다시 지어졌다고 한다. 검은 머리 전당 앞에는 세계 최초로 크리스마스트리가 세워진 자리도 표시돼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1510년 겨울 검은 머리 길드 회원들이 그 자리에 화려한 장식으로 꾸민 전나무를 세우고 밤새워 파티를 즐긴 것을 시작으로 트리 문화가 전파됐다고 한다.
광장 끝에 성 페테르스 성당이 도시의 주인공처럼 우뚝 서 있다. 성 페테르스는 예수의 제자 성 베드로의 라트비아식 이름이다. 123.5m 높이 첨탑 꼭대기의 수탉이 황금빛으로 빛난다. 수탉 풍향계는 발트해로부터 불어온 바람에 천천히 삐걱댄다. 리가의 첨탑마다 매달린 수탉 모양 풍향계를 처음으로 매단 성당이 바로 이곳이다.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완전히 폐허가 되고 말았는데, 그 후 몇 차례 공사를 통해 층층계단 대신 승강기가 있는 첨탑으로 거듭나게 된다.
리투아니아 샤울레이를 향해 리가를 떠난다. 리투아니아 국경으로 가는 2차선 국도는 도로 사정이 여의치 않다. 2시간 걸려 도착한 국경 검문소에서 도로비를 지불하고 미인과 농구의 나라. 숲과 호수의 나라 리투아니아에 들어선다. 고속도로가 없는 리투아니아 1번 도로 주위로 끝없이 초지가 펼쳐진다. 그 넒은 평원 속에 거대한 사슴 농장과 말 사육장들이 있다.
리가에서 2시간 걸려 샤울레이 ‘십자가의 언덕’에 도착한다. 유럽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기독교 국가가 된 리투아니아는 원래부터 십자가가 많았는데 우리나라 장승에 비유된다고 보면 된다. 어떤 불치병 환자가 십자가를 언덕에 세운 후 병이 완치되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자신의 소망을 담아 십자가를 세우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게 되었는데, 소련 연방 시절 전제 정치 세력과 자유를 갈망하는 리투아니아 국민들 사이의 대결 장소로 명성을 높이게 된다. 1993년 교황 요한 바오르 2세의 방문으로 더 유명해진 샤울레이에는 크고 작은 십자가가 40만개가 넘는다.
1978년 대학 3학년 때 당시 대학생들에게 최고 인기 있었던 대학가요제에서 심수봉이 부른 “백 만 송이 장미”를 들은 후 느닷없이 찾아온 감상(感傷). 남녀의 사랑에 관한 러시아 민요일 뿐인데 마음 속 깊이 파고드는 애잔함에 가슴이 먹먹해 졌었지. 40년 세월이 흐른 뒤 이곳 라트비아에서 원곡 ‘마리나의 선물’을 들어보니 가련함과 서글픔의 농도는 더욱 짙어진다.
심수봉이 부른 노래를 듣고 절절하게 가슴앓이를 했던 이유를 지금에서야 이곳 라트비아에서 찾은 것 같다.
발트는 3개월 넘게 눈으로 뒤덮인 차고 습한 겨울의 땅이다. 하지만 짧은 봄과 여름은 겨울과 전혀 다른 풍경으로 발트를 기억하게 한다. 그런 겨울과 봄, 여름의 '다른' 기억은 숱한 생존과 애환의 뒷이야기를 남기게 되고, 그것이 시나브로 구전과 전설, 민속 노래, 찬가 등에 스며들어 자연스럽게 형성된 발트 문화는 외세의 숱한 억압을 견뎌내는 힘의 원천이 되었던 것이 아닐까.
여계봉 선임기자